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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중에서 발췌한 글
「바가바드기타」중에서 발췌한 글



- 마하트마 간디 지음, 이현주 옮김, 도서출판 당대, 2001.10.4 -



(p.5)

「˝『기타』는 역사논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촌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두 본성,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더 풍부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세대에 걸쳐 『기타』의 중요한 언어들은 새롭고 더욱 깊은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머리말



(p.10∼p.14)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제2장의 마지막 열아홉 줄[行]은 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열아홉 줄 속에 ´다르마´의 알속이 다 들어 있다. 거기에는 최고의 지식(知識)이 구현되어 있다. 그 열아홉 줄에 담겨 있는 원리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최고 수준의 지성(知性)이 번뜩인다. 아니 그 자체가 높은 목적을 위하여 단련된 지성이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지식은 경험의 결실(結實)이다.

이것이 『기타』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여러 번역판과 주석서를 읽었고 또 여러 강좌를 들었지만, 지금도 첫 만남에서 얻은 감명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앞에서 말한 제2장 끝의 열아홉 줄은 『기타』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기타』의 다른 부분에 이 열아홉 줄의 내용과 모순되는 내용이 있거든 차라리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거기에 한번 무릎 꿇어본 사람이라면 서슴없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 부분이 그 부분하고 연결이 잘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나의 깨달음이 아직 모자라기 때문이다. 언제고 때가 되면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맥이 통하고 있는지가 보일 것이다.˝

경전(經典, Shastra)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잘 성숙된 도덕적 감수성과 경전이 말하는 진리를 좇아서 살아보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경전을 해설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경전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경전의 명령을 기계처럼 지키는 것은 힘은 힘대로 들고 아무 유익이 없다. 경전은 그것을 읽는 사람이 저마다 ´스승´(guru)을 모셔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요즘에는 스승이 드물어, 학식 있는 현인(賢人)들이 경건미 넘치는 지방사투리로 정규적인 경전공부에 도움을 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경건하지도 않고 신심(信心)도 부족한 자들을 경전의 뜻을 풀이하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 이른바 유식(有識)한 자들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며 경전에서 멋대로 그럴싸한 의미를 읽어낸다. 그들이 경전의 참뜻을 밝히리라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오직 경전이 명령하는 바를 좇아서 살아가는 실습(實習)을 하는 자만이 그 참뜻을 해설할 수 있는 것이다.」



「진실은 적극적인 가치다. 비폭력은 소극적인 가치다. 진실은 긍정한다. 비폭력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어떤 것을 금지한다. 진실은 존재한다. 비진실(非眞實)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은 존재한다. 비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다르마[法]는 비폭력만이 있어야 한다고, 비폭력만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진실이 그것을 입증해 주고 비폭력은 그것이 맺는 최상의 열매다. 비폭력은 불가피하게 진실 속에 내포되어 있다. 비폭력이 진실만큼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간혹 그것을 믿지 않으면서 경전의 뜻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비폭력의 정신만이 경전의 참뜻을 밝혀줄 것이다.

진리를 실현코자 한다면 ´타파스차리아´(tapascharya, 종교수련의 하나로서 자발적으로 자기 몸을 괴롭힘)가 반드시 필요하다. 진리를 실현한 어떤 현자(賢者)는 폭력이 넘치는 바다 한복판에서 비폭력의 여신(女神)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폭력은 환(幻)에서 온다. 폭력은 유용하지 못하다. 비폭력만이 홀로 참되다.˝ 비폭력 없이는 진리를 실현할 수 없다. 도둑질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겠다는 ´브라마차리아´(brahmacharya) 서약(誓約)은 비폭력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다. ´브라마차리아´ 서약은 사람이 자기 자신 안에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게 돕는다. 그것은 진리의 숨[生氣]이다. 그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일찌감치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는 경전의 뜻을 이해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경전의 어느 본문이 지니고 있는 뜻을 읽어내는 데 필요한 두 번째 규칙은 문자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문자에 매달리지 말고 그 정신을, 그 의미를, 전체 맥락 안에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제2장



(p.61)

「만일 우리가 공적(功績)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최선(最善)의 것이라 해도 그 속에는 악(惡)의 요소가 들어 있다. 세상에는 온전히 선한 것도 없고 온전히 악한 것도 없다. 행위가 있는 곳이면 얼마만큼의 악이 있게 마련이다.」



(p.67∼p.69)

「자기의 지력을 한 목적에 고정시키지 않는 사람, 오직 한곳에 자기를 바치지 않는 사람의 행동은 여러 갈래로 어지러이 분산될 것이다. 그 마음이 원숭이처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건너뛸 때마다 그의 지성(知性)도 그럴 것이다. 자기의 목숨에 집착하는 자는 ´바이드´(vaid)든 무당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도움을 요청한다. 이와 비슷하게,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다니는 원숭이는 마침내 고무줄총에 맞아 비명횡사를 당하고 만다. 목표가 확실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나약해지고 너무나도 불안하여 그 순간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오늘의 정치판은 선(善)이란 찾아볼 수 없고 온통 악(惡)으로 가득 차 있다. 가는 곳마다 들리느니 아첨하는 소리요 사람들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 오늘의 정치는 우리가 ´아트만´(개인의 자아)을 실현할 수 있게 도와주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다르마(종교의 가르침, 법)를 잃었고 선행(善行)을 할 능력도 잃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함께 잃었다.

반면에 만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신앙을 지닐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 봉사할 수 있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으며 큰 위험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짓누르는 것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또한 동시에 저 세상에서 복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의 뜻이 확고하지 않아 보인다면 그 사람은 왕도를 따르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우리 모두 가슴속에 신앙을 품고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요 비록 서로 독립된 존재들이지만 참된 평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두 장 나뭇잎이라 해도 평등하지 않다.」



(p.75∼p.76)

「행위만이 본분이요 그 열매는 아니니라. 행위의 열매를 동기로 삼지 말 것이며, 행위를 피하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제2장 47]」



「그대들의 권리(right)는 일하는 것이지 그 열매는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자기 노예에게 말한다. ˝맡은 일이나 하고 농장에서 열매를 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너는 내가 주는 것만 받으면 된다.˝ 신(神)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제한한다. 그는 우리에게, 원한다면 일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일삯은 일체 자기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임무는 그분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현자는 신중하게 의식적으로, 자기는 세상의 노예가 아니라 신(神)의 노예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신(神)이 그를 거절하는 듯이 보이면 보일수록 그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쓴다.」



「˝행위의 열매를 얻고자 고통을 겪는다는 생각으로 행동하지 말아라. 행위에 얽매이지 말아라. 무슨 일이든 지나치게 열심히 하지 말아라. 모든 일이 내가 하는 것임을 생각하여라. 도대체 무슨 근거로 네가 일한다고 생각하느냐?˝」



(p.77∼p.78)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이른다. ˝그대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유혹을, 그대의 임무가 아닌 일에 몰두하고 싶다는 느낌을, 멀리해야만 한다.˝



오, 다난자야여. 집착없이 행동하며 요가(수행, 수련)에 굳게 서고 성공과 실패에 마음 고요할지어다. 마음의 고요함이 요가이니라. [제2장 48]



집착하는 일 없이 일하되 요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라. 요가는 행위의 열매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카르마´인 일의 열매를 바라지 않는 것이 요가다. 선한 일에 집착하는 것, 이것도 잘못인가? 그렇다. 잘못이다. 만일 우리가 ´스와라즈´(swaraj, 독립자치)에 집착한다면 망설임 없이 나쁜 수단을 마구 쓰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은화를 줄 만큼 각별하게 군다면 바로 그가 어느날 그것을 훔쳐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기(動機)가 좋은 일이라 해도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의 수단이 순결하게 남아 있고 우리의 행위 또한 순결한 행위가 될 것이다.

나아가서, 스리 크리슈나는 말한다. 성공과 실패에 대하여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고.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를 크리슈나에게 바치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을 평등심(平等心)으로 대하는 사람이야말로 요가를 성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슈나는 같은 생각을 거듭 설명한다.



오, 다난자야여. 행위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행위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니, 초연(超然)한 태도에 들어 안도(安堵)할지어다. 결과를 바라고 행동하는 자야말로 한심한 자들이니라. [제2장 49]



지력(知力)의 요가(yoga)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극히 위험하다. 많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런즉 사람은 지(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知)란 단호하게 결심된 지력(知力)을 뜻한다. 일단 한번 결단이 내려지면 그 일로 더 이상 논란이 있어서는 안 된다. 보상을 바라고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크리판´(kripan)이다. 불쌍히 여겨 마땅한 자다.」



(p.79∼p.80)

「여기 이 세상에서, 초연한 태도를 선물로 받은 자는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의 과보(果報)를 벗어나는도다. 그런즉, 그대 자신을 요가에 비끄러맬지어다. 요가는 동(動) 속의 정(靜)이니라. [제2장 50]」



「초연한 태도를 선물로 받아 행위의 결과를 바라지 않는 현자(賢者)들은, 태어남이라는 사슬에서 풀려나 온갖 재난과 병고(病苦)로부터 해방된 상태에 들기 때문이로다. [제2장 51]」



「그대의 지식이 미혹(迷惑)의 수렁을 벗어날 때, 그때 그대는 이미 들은 것과 앞으로 듣게 될 것에 대하여 똑같이 무심(無心)하게 되리라. [제2장 52]」



「듣는 것이 너무 많아 어지러워진 그대의 지식이 집중(集中) 속에 안정하여 고요한 정(靜)에 들 때, 그때 그대는 요가를 성취하리라. [제2장 53]」



(p.82∼p.84)

「오, 파르타여.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나는 모든 갈망(渴望)을 물리치고 오직 ´아트만´한테서만 스스로 위안을 찾을 때, 우리는 그를 확실히 깨달아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느니라. [제2장 55]」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고요히 만족하게 되는 상태를 나라시나 메타[Narasinha Mehta, 구자라트(Gujarat)의 15세기 시성(詩聖)]가 그의 시에서 잘 묘사해 놓았다. ˝브라만 앞에서 가벼이 춤추며 돌아가는 브라만.˝ 시인은 바로 그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만´이 ´브라만´ 앞에서 ´브라만´을 통하여 스스로 그 모든 즐거움을 누린다. 노예는, 주인 없는 자신의 존재를 결코 상상할 수 없다. 하루 스물네 시간 남의 이름만 부르며 사는 사람은 마침내 자기의 이름을 잊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트만´[개인의 자아(自我, self)]이 ´파라마트만´[우주의 자아]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트만´은 ´파라마트만´의 한 줄기 빛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태양의 빛이 곧 태양이다. 신(神)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우리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을 신(神)의 노예로 만드는 자는 신(神)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상태는, 자기 주변에 온갖 소유물을 쌓아놓고 자기만족에 속아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자족(自足)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목적과 수단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 과연 자기를 통하여 자기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새로운 정신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면 그럴 수 있다.」



(p.86∼p.87)

「마음이 슬픔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에 치닫지 않는 사람, 정욕과 두려움과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확실한 깨달음에 이른 고행자(苦行者)라 부를 수 있도다. [제2장 56]



고통으로 말미암아 낙담하지 않는 사람, (고통이란 언제나 어떤 동기에서 오는 것임을 알라) 고통에 굴복당하지 않는 사람, 쾌락의 한복판에서 무심하며 집착, 불안, 분노에 더 이상 예속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일컬어 ´스티타디´(sthitadhi)라고, 그 뜻이 든든히 서 있어 결코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 어디에도 애착하지 않는 사람, 눈앞에 선(善)이 나타나든 악(惡)이 나타나든 기뻐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깨달음은 확고부동이니라. [제2장 57]



모든 대상에서 흥미를 거두어버린 사람, 그것들에 대한 욕망을 버린 사람, 좋은 기회 나쁜 기회에 관계하지 않고 무심한 사람, 어떤 일로도 즐거워하거나 불쾌해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지력(知力)은 흔들리지 않는다. 스리 크리슈나는 예를 들어 말한다.



거북이 사방으로부터 네 발을 오무라들이듯이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감각을 끌어들일 때, 그때 그 사람의 지력(知力)은 흔들림이 없도다. [제2장 58]



거북이 네 발을 끌어들여 한 배갑(背甲) 아래 모으듯이, 자신의 감각을 붙잡아 대상에 매이지 않게 하는 사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지력(知力)을 지닌 사람이다. 자신의 감각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사람만이 신(神)에게 온전히 예속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감각이 자신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처럼 여겨질 때는 거북을 생각할 일이다.」



(p.88∼p.90)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쇠약하게 만들 때 감각의 대상들이 그에게서 사라져가지만, 그것들을 바라는 갈망(渴望)은 사라지지 않느니라. 그가 지고자(至高者)를 붙잡을 때 마침내 갈망까지도 사라지는도다. [제2장 59]」



「자신의 몸한테, 그 몸이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주지 않는 사람만이 자신의 감각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자신의 감각이 잘 조절되지 않거든 단식을 하는 게 좋다. 전혀 조절되지 않으면 아예 음식을 딱 끊어버려야 한다.」



「단식하는 동안에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전심전력으로 원해야 한다고. 나아가서 우리가 신(神)을 뵙고자 간절히 바랄 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금식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금식을 하는 동안 우리의 유일한 욕망은 신(神)을 뵙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식욕이 그 길을 가로막고 서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약하게 만들어야 한다. 신(神)을 만나본 뒤에는 음식을 먹든 먹지 않든 그게 그거다.」



(p.96∼p.97)

「현자(賢者)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 카운테야여, 휘어잡을 수 없는 감각들이 억지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도다. [제2장 60]」



「배워서 웬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감각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그의 자기억제를 무너뜨리고 그 마음을 대상(對象)으로 치닫게 강제한다. 그들은 ´즈나니´[jnani, 정신적 깨달음을 얻어 계몽하는 사람]까지도 흔들어 놓는다. 감각은 마치 휘어잡을 수 없는 야생마 같다. 기수(騎手)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고삐를 단단히 잡지 않으면 그것들이 어디로 달려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원숭이, 게다가 술까지 취한 원숭이˝[구자라트의 속담] 꼴이 될 것이다.」



「이것들을 단단히 틀어잡고서 요기(yogi)는 오로지 나에게 열중해야 하느니라. 자신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깨달음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제2장 61]」



(p.101)

「감각의 대상(對象)들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한테서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솟아나느니, 애착은 열망을 낳고 열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마비(痲痺)를 낳고 마비는 기억상실을 가져다주고 기억상실은 이성(理性)을 파괴하고 이성의 파괴는 철저한 파멸을 이끄는도다. [제2장 62, 63]」



(p.102∼p.105)

「그러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에서 떠나 아트만의 다스림을 받는 감각으로 감각-대상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단련된 영혼은 마음의 평화를 얻느니라. [제2장 64]」



「마음의 평화는 모든 질병의 끝을 뜻하나니, 그 마음이 평온한 자의 깨달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로다. [제2장 63]」



「단련되지 않은 사람은 깨달음도 헌신도 없나니, 헌신이 없는 자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자에게는 어디서 행복을 얻을 곳이 없느니라. [제2장 66]」



(p.107∼p.108)

「그의 마음이 떠돌아다니는 감각을 좇아 치달릴 때, 바람이 바다 위의 배를 휩쓸어가듯이 그의 깨달음을 휩쓸어가는도다. [제2장 67]」



「그러기에 오, 마하바후여. 사방에 널려 있는 대상(對象)들로부터 모든 감각이 통제되는 사람은 어김없이 깨달은 사람이니라. [제2장 68]」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한밤중일 때 단련된 영혼은 깨어 있고, 다른 모든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그때가 눈밝은 수행자(修行者)에게는 밤중이로다. [제2장 69]」



(p.111∼p.114)

「참으로 명상의 삶을 사는 사람은 밖으로 볼 때 속인(俗人)처럼 보인다. 그의 마음은 종일토록 신(神)에게 몰입되어 있지만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명상의 삶을 살고 있노라고 나팔을 불어대지 않는다.」



「갈망(渴望)을 품어 기르는 자가 아니라, 강물로 채워지면서도 결코 흘러 넘치지 않는 대양(大洋)에 모든 강물이 스며들어 없어지듯이, 자기 안에서 모든 갈망이 없어진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발견하느니라. [제2장 70]」



「모든 갈망을 벗어버리고 무심으로 행동하는 사람,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얻는도다. [제2장 71]



자신의 모든 열망을 포기하고 욕망에 시달리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그런 평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의식(意識)을 지워버림으로써 그 평화를 얻는다. ´내가 이것을 한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만이 진짜 요기다.



오, 파르타여. 이것이 브라만의 품에 안식(安息)하는 자의 상태니, 이 상태에 도달한 그는 속지 않느니라.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는 순간에도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도다. [제2장 72]」



제3장



(p.155)

「그러나 ´아트만´에 몰입되어 있는 사람, ´아트만´에 흡족한 사람, ´아트만´으로만 만족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도다. [제3장 17]

그는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 데 관심이 없고 무슨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도 관심이 없으며, 사사로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의지할 필요도 그에게는 없느니라. [제3장 18]」



(p.167)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자의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나니, 깨닫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행동에 얽매여 있도다. 깨달은 자는 오히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일을 이룸으로써 깨닫지 못한 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심어주어야 하느니라. [제3장 26]」



(p.184)

「우리는 자신의 가슴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인간에게만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파지운동)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사이에 사랑이 통하는 사람만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런 사랑이 없을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들의 일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다. 툴시다스는 사악한 자들에게 협조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p.186)

「공로가 없더라도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남의 일을 해주는 것보다 나으니라. 자신의 임무를 다하다가 죽는 것이 나으니, 남의 임무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도다. [제3장 35]」



(p.188∼p.190)

「어째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지도 않으면서 나쁜 길을 걷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탐욕이요 분노요 구나(존재의 양태)의 소생인 라자스(활동)니라. 그것은 교활한 탐식가요 교활한 죄인이니라.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적(敵)임을 알지어다. [제3장 37]」



「불꽃이 연기에 싸여 잘 안 보이고 거울이 먼지에 덮여 잘 안보이고 태아가 탯집에 싸여 잘 안 보이듯이, 지식(知識) 또한 이것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느니라. [제3장 38]」



「오, 카운테야여.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인 탐욕의 모습을 한, 지혜로운 인간의 영원한 적에 의하여 지식(知識)은 가려져 있도다. [제3장 39]」



(p.191)

「그런즉 그분이 이성(理性)보다 더 강하신 것을 깨달아 알고 나를 ´나´(아트만)로 다스릴지어다. 오, 마하바후여, 참으로 이기기 어려운 적 탐욕을 파멸시킬지어다. [제3장 43]」



제4장



(p.219)

「그는 영(靈)이다. 이는 그의 법이 영이요, 그의 법이 곧 신이라는 말이다. 그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행위자가 아니다. 우주가 질서를 좇아 운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이 그 질서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그가 만든 이면서 만든 이가 아니라고 말한다-그것이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신(神)의 미스터리(神秘)다.」



(p.219∼P.223)

「신(神)은 기계처럼 일한다. 그는 그의 법이다. 그는 법을 만드신 분이요 그것을 집행하는 분이다. 그분의 법은 참으로 완벽한 질서(order)를 보여주고 있다. 신이 당신의 법을 유예시키거나 그대로 시행하는 데 대하여는 의심할 근거가 없다. 그 기계는 영원 전부터 작동되어 왔다. 신의 법은 그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부터, 우리가 신에 대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실행되어 왔다. 우리는 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카르마[業]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 어떤 행위(카르마)를 통해서 채워보려는 바람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의 모든 부속품은 쉬지 않고 제 기능을 다 한다.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그 뒤에 서 있는 인간이다. 신에 연관시켜 본다면, 우리는 신 자신이 곧 기계이면서 기술자라고 생각한다. 업보(業報)로 고통받는 기계 또는 행위[業]를 통해 무엇을 성취코자 하는 기계를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기계는 그냥 돌아갈 뿐이다. 우리가 만일 기계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여 일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그 일 속에서 자신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니까 우리는 자신의 임무를 반드시 확인해 보아야 한다.

탐욕스런 인간은 자신의 탐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탐욕의 화신이 된다. 그런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은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열망 속에서 자신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자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고 그 목적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결코 나쁜 욕망으로 말미암아 어지럽혀지지 않고 마침내 신(神)과 하나 된다. 우리가 만일 신 안에서 자기를 잃고 기계가 되어 자신을 신의 손에 들린 질흙으로 만든다면, 그리하여 신과 하나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 아닌가? 우리는 신 안에서 완벽하게 자기를 잃어야 한다.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나에 관한 이 진리를 아는 자마다 결코 카르마(행위, 業)에 묶이지 않느니라.˝[4장 14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신의 법을 아는 사람은 일을 하되 그 일을 통하여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일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일을 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나´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조바심 내거나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에 깊숙이 몰입되어 언제 그 일을 그만둘 것인지도 모르는 그런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계처럼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저명한 화가의 작품인 매우 아름다운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다. 여자들이 밭에서 곡괭이를 들고 일을 하고 있다. 그중 한 여자가 곡괭이로 땅을 파려는 바로 그때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여자는 곡괭이를 놓고 무릎을 꿇듯이 허리를 숙여 기도를 시작한다. 시인은-그 화가는 시인이다-기계처럼 일하고 있는 여인을 그렸던 것이다. 그 여자들한테는 노동이 곧 예배였다. 라틴어로, 육체노동이 예배의 한 양식(樣式)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기도시간만 되면 자동적으로 무릎을 꿇을 것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기로 결심한 사람은 시계가 4시를 알리면 침상에서 일어난다. 그런 사람이 기도시간에 기도를 못하게 되면 거기에 마음이 쓰여서 하는 일에 집중이 잘 안 될 것이다.

그렇게 자기 몸을 바쳐 일하는 사람이 카르마의 영향을 받아 괴로워할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가 하는 일로 말미암아 긴장감을 느끼는 일이 없다. 그는 늘 신선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행복감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일을 중단하고 몸을 쉬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방문객이 있어서 일을 멈추어야 할 경우에는 오히려 비감(悲感)해진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카르마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탐욕스런 사람은 자신의 탐욕 안에서 자기를 잃는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쾌락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자신의 방종(放縱)에 싫증을 낸다. 쾌락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에 대해 조만간 싫증을 내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미각(味覺)에 싫증을 내면 그는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미각에 싫증 내지 않고 음식을 맛으로 먹지 않는 그런 사람이 어떤 질병으로 고생하겠는가? 사람은 손으로 일을 하되 거기서 쾌락을 얻고자 기대하지 말고 그냥 마땅히 자기가 할 일로 알고 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은,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아무것도 얻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업보(業報)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神)은 이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지만 업보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데 먹고 마실 것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육체에 싫증을 내기에 카르마의 영향을 받아서 괴로워한다.

신은 늘 깨어 있다. 우리는 한동안 깨어 있다가 잠자고 음식먹고 배고픔을 느낀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늘 깨어 있으면서 스스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바가 없다. 그는 잠도 자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는다. 행위를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행위 뒤에는 자기중심성(egotism)의 흔적과 ´나´에 대한 집착이 숨어 있다. 우리의 행위는 의지(will)의 실현인 것이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은 찰나의 중단도 없이 늘 깨어 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긴 하지만 그와 같이 일하는 것을 우리의 이상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가장 훌륭한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스리 크리슈나가, 요가는 행위의 기술이라고[2장 50절] 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요가를 확고하게 수련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조바심 내며 안달하는 사람보다 일을 더 잘한다는 말이다.



해탈을 갈망한 옛사람들은 이를 알고서 행위하였느니라. 그런즉 그대로 지난날에 살았던 이들을 본받아 행위할지어다. [제4장 15]



옛적에 ´모크샤´(해탈)를 추구했던 이들은 이 진리를 알고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일했다. 신(神)을 깨닫는다(realize)는 것은 신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몸을 바쳐 쉬임 없이 경계하며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육신을 입고 살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신을 본받아야 한다.」



(p.228∼p.230)

「우리는 이 세계의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의 임무는 이 기계의 한 부품으로서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깨어 있는 매순간 우리 몫으로 배당된 일을 하되 그 일에 얽매이지 않고 조용히 담담하게 해야 한다. 물레방아 바퀴를 돌리는 황소는 돌고 또 돌지만 물통은 제자리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물통이 아니고 우리 가슴이었다면 분명히 아래로 떨어졌겠지만, 물통은 그냥 그대로 제자리에 조용히 남아 있다. 그와 같은 조용함으로 우리 자신을 채워야 한다. 반면에, 만일 우리 마음이 어지럽혀져 있다면 우리는 일손을 놓고 쉴 수 있지만 그러나 행위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전히 뭔가를 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더욱 세게 족쇄에 매일 것이고 비참한 운명이 그를 기다릴 따름이다. 만일 그가, 일상사(日常事)에 스스로 비끄러매인 자들은 자기를 얽매는 카르마의 사슬을 짜고 있는 것이요 자기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자기한테 속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이 카르마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주인님이, 카르마에 관한 진리는 깊은 신비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생각으로 카르마를 행하는 자는 너무도 무거워서 결코 벗어던질 수 없는 짐을 스스로 어깨에 얹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하되 다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어서 하는 사람은, 그리고 만일 그가 어떤 특별한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일에서 손을 뗀다면, 그 사람은 자기 몸을 그 어떤 카르마의 사슬로도 묶지 않는 사람이다.

어제 저녁 나는 몇 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그들을 꾸짖었다. 그 일에 대해서 누군가 나에게, 내 목소리에 짜증기가 섞여 있었던 것은 내가 성을 내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신(神)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만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자일 뿐, 남의 선생(guru)이 되기에는 적합지 못한 자다. 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래서 흥분을 하면 목소리가 절로 커진다. 내가 만일 내 몸에서 모든 욕망을 지워버리는 데 성공했더라면 화를 내면서도 목소리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러나 가끔 내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에 분노의 불꽃이 이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아르주나가 마음속으로 주인님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이 자기 의지에 반(反)하는 악한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나와 같은 상태였을 것이다. [제3장 36] 나는 여전히 욕망과 분노에 휘둘리고 있다.」



(p.234)

「그의 모든 행실이 욕망과 이기적인 목적에서 해방된 사람, 자신의 모든 행위가 지식의 불꽃에 타버린 사람, 그런 사람을 현자(賢者)는 ´판디타´(pandita, 자기를 실현한 사람)라고 부르느니라. [제4장 19]」



(p.236∼p.237)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만족하며 모든 의존(依存)에서 해방된 사람, 그 사람은 행위를 하지만 아무짓도 하지 않는도다. [제4장 20]」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다만 그 몸으로 행위를 하는 사람, 그는 아무 오점(汚點)도 남기지 않느니라. [제4장 21]」



(p.239∼p.240)

「우연히 발생되는 모든 일에 스스로 만족하고 반대되는 양극(兩極)을 넘어 악한 뜻에서 자유롭고, 성공과 실패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행위를 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느니라. [제4장 22]」



「모든 집착을 여의고 그 마음이 참된 지식에 굳건히 뿌리박혀 있고 오직 신(神)에게 바쳐진 공물(供物)로서 행위하는 자유혼에게는 모든 카르마가 소멸되는도다. [제4장 23]」



제5장



(p.271)

「몸 안에 거하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는 마음으로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아홉 문(門)이 있는 자신의 성(城)에서 행복하게 휴식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꾀하지 않느니라. [제5장 13]」



(p.281)

「다만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사람, 다만 안에서 안식하는 사람, 다만 안에서 빛을 내는 사람, 그 사람이 요가요 자연과 하나 되어 ´브라만´과 합일을 이룬 자로다. [제5장 24]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평화를 발견하는 사람,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바깥의 어떤 사물이 필요 없는 사람, 언제나 자기한테 전념(專念)하며 자기 안에 있는 빛의 영감을 받는 사람, 그런 요기가 ´브라만´ 속에 녹아들어 그 안에서 열반(나르바나)을 얻는다.」



제7장



(p.330)

「온갖 갈망으로 인해 지식을 잃어버린 자들이 다른 신들한테서 도피처를 찾고 이런저런 의식(儀式)에 믿음을 걸고 제 본성의 안내를 받느니라. [제7장 20]」



(p.330∼331)

「인간이 어떤 모양으로 신앙과 헌신 안에서 나를 예배하더라도 나는 바로 그 모양 안에서 그의 신앙을 든든하게 해주느니라. [제7장 21]」



「제 뜻대로 다할 수 있는 독립된 신들(gods)이 많이 있다면, 그렇다면 신(the God)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눈이 짧은 그런 자들에게 내려지는 열매는 한계가 있나니,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신들에게로 가고 나를 섬기는 자들은 내게로 오느니라. [제7장 23]」



「분별을 못하는 자들은 내가 모든 것을 초월해 있고 영원하고 더없이 높은 신(神)임을 모르고, 드러나지 않는 나를 드러난 존재로 아는도다. [제7장 24]」



제12장



(p.418∼p.419)

「언제나 만족하는 사람, 요가를 실천하고, 자기를 억제하며, 단단한 확신을 품고, 마음과 지성(知性)을 내게 바친 사람, 그렇게 자신을 내게 바친 사람(바크타)이 나의 소중한 자니라.

세상에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 세상이 그에게 괴로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 들뜬 환희, 양심, 두려움, 원망에서 자유로운 사람, 그가 나의 소중한 자니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 순진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풍부하고 태연하고 침착한 사람, 어떤 일에도 빠져들어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 그렇게 자신을 내게 바친 사람이 나의 소중한 자니라. [제12장 14∼16]」



「기뻐하지도 않고 안달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 사람, 턱없이 욕심부리지 않는 사람, 선과 악을 함께 버린 사람, 그렇게 자신을 내게 바친 사람이 나의 소중한 자니라.

원수와 친구를 똑같이 대하는 사람, 존경받는 것과 존경받지 못하는 것, 찬 것과 뜨거운 것, 쾌락과 고통을 똑같이 여기는 사람, 모든 집착에서 해방된 사람,

꾸중과 칭찬의 저울추가 똑같은 사람, 말 없는 사람, 주어진 몫에 만족하는 사람, 집 없는 사람, 마음이 늘 고요히 안정되어 있는 사람, 그렇게 자신을 내게 바친 사람이 나의 소중한 자니라. [제12장 17∼19]」



제13장



(p.423∼p.424)

「교만과 오만에서 해방됨, 비폭력, 용서, 정직, 주인을 섬김, 순결, 불변함, 자기억제,

감각의 대상에 대한 혐오, 변덕의 부재(不在), 나고 죽고 늙고 병듦의 고(苦)를 깨달음,

집착의 부재, 자신의 자녀, 아내, 가정, 가족에 묻혀 있기를 거절함, 선이든 악이든 깨어 있어서 알아차리기,

내게 향한 흔들리지 않는 헌신, 조용한 곳에 머무름, 어중이 떠중이들과 섞여 지내는 것을 싫어함.

´아트만´의 본성을 확신함, 진리를 아는 지식의 목표를 인식함,-이 모두가 지식이요 그 반대는 무지(無知)니라. [제13장 7∼11]」



(p.425∼p.426)

「그것은 모든 곳에 손과 발이 있고 모든 곳에 눈, 머리, 입이 있고 모든 곳에 귀가 있어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싸는도다.

감각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모든 감각을 여의었나니, 아무것에도 닿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잡고 ´구나´(성질, 존재의 양태들)를 소유하지 않으면서 ´구나´를 경험하느니라.

그것은 만유(萬有) 밖에 있으면서 그것들 안에 있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고, 너무나도 미묘하여 지각(知覺)되지 않고, 너무 멀리 있으면서 너무 가까이 있느니라.

나뉘지 않는 몸으로 모든 존재물 안에 나뉘어 들어가 있는 듯한, 이 ´브라만´(힌두 삼위일체 가운데 창조주)은 모든 것을 존속케 하는 자로 알려져 있으면서 또한 그것들을 파멸하고 창조하는 자니라. [제13장 13∼16)」



제14장



(p.449)

「무심한 경지에 앉아 있는 그는 ´구나´들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하며 움직이지 않느니, 이는 ´구나´들이 제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이로다.

쾌락과 아픔을 하나로 여기고 흙과 돌과 금을 똑같이 여기는 사람, 언제나 침착한 사람, 슬기롭고, 칭찬과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 유쾌함과 불쾌함을 똑같은 무게로 저울에 다는 사람,

존경과 경멸을 똑같이 대하는 사람, 적과 친구에게 동일한 사람, 환락에 탐닉하지 않는 사람-그 사람을 ´구나티타´[구나를 초월한 자]라고 부를 수 있느니라. [제14장 23∼25]」



제16장



(p.459∼p.460)

「두려움 없음, 마음이 순결함, ´즈나나´와 요가-지식과 행위-에 굳게 섬, 자비로운 선행, 자기통제, 희생, 마음공부에 성실함, 고행, 곧음,

비폭력, 진실, 더디 성냄, 자기를 바치는 정신, 침착함, 욕하기를 싫어함,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향해 온유함, 탐욕에서 자유로움, 부드러움, 겸손함, 까불지 아니함,

생동함, 용서함, 꿋꿋함, 순수함, 나쁜 뜻과 오만함에서 자유로움-오, 바라타여, 이것들이 신성(神性)의 유산을 받아 태어난 자에게서 발견되는 것들이니라. [제16장 1∼3]」



「잘난 체함, 거드름, 자기기만, 격노, 야비함, 무지(無知)-이런 것들은 악마의 유산을 받아 태어난 자에게서 발견되느니라. [제16장 4]」



(p.461∼p.462)

「그들은 말하는도다. ˝진리도 없이, 바탕도 없이, 신(神)도 없이 우주는 존재한다. 그것은 성(性)의 결합으로 태어났고 색욕(色慾)을 생각나게 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타락한 영혼들은 형편없는 이해력과 난폭한 행동으로 세계의 적이 되어 세계를 파결시키느니라.

만족을 모르는 탐욕에 빠지고, 잘난 척하는 오만과 자만에 사로잡힌 그들은 속임수로 사악한 목적을 노리며 깨끗하지 못한 행실을 하기로 서약하였도다.

죽음으로 끝날 따름인 끝없는 염려에 자신을 내어주고 방종과 탐욕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인생이란 그것뿐이라고 확신하며,

수만 가지 욕망의 족쇄에 묶이고 탐욕과 분노의 노예가 된 그들은 제 애욕을 충족시키고자 불법으로 재물을 쌓아두려고 하는도다. [제16장 8∼12]」



(p.464∼p.465)

「자만, 폭력, 오만, 탐욕, 분노에 자신을 내어준 그들은 조롱하는 자들이 되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 몸안에 있는 나를 함께 경멸하는도다.

이들, 나를 경멸하는 자들, 인류의 가장 비열하고 더러운 자들을 나는 다시 아래로 내던져 악마의 자궁 속에 밀어넣느니라.

그리하여 저 미혹된 자들은 악마의 자궁에 떨어져, 나한테서는 더욱더 멀어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는도다.

사람을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지옥문은 세 겹으로 되어 있으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이 셋은 그러므로 마땅히 멀리해야 하느니라. [제16장 18∼21]」



제17장



(p.475)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진실하고 사랑스럽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말을 하면서 경(經)을 늘 암송하는 것이 입(말)의 고행이니라.

흔들리지 않고 온유하고 조용하고 자기를 제어하고, 그 정신이 맑고 깨끗한 것이 마음의 고행이니라.

열매를 탐하지 않는 사람이 온전한 믿음으로 이 세 가지 고행을 실천하면 그것을 일컬어 ´삿트비크´한 고행이라고 하느니라.

칭찬과 명예와 존경을 받는 데 눈독을 들이고 겉치레로 실천하는 고행은 일컬어 ´라자시크´한 고행이라 하거니와 이는 덧없이 지나가고 굳건하지 못하니라.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남을 파멸로 이끌기나 하는 고행은 일컬어 ´타마시크´한 고행이라 하는도다. [제17장 15∼19]」



바가바드키타 전문



간디가 ˝기타의 최고의 지식˝이라고 매일 외운 19줄(2장 52-72)

(p.560∼p.562)

「52 그대의 지식이 미혹의 수렁을 벗어날 때, 그때 그대는 이미 들은 것과 앞으로 듣게 될 것에 대하여 똑같이 무심하게 되리라.

53 듣는 것이 너무 많아 어지러워진 그대의 지식이 집중 속에 안정하여 고요한 정(靜)에 들 때, 그때 그대는 요가를 성취하리라.

54 오, 크리슈나여, 안정된 지혜를 지니고 초의식 상태에 잠긴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나이까? 그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앉고, 어떻게 걷나이까?

55 오, 파르타여.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나는 모든 갈망을 물리치고 오직 ´아트만´한테서만 스스로 위안을 찾을 때, 우리는 그를 확실히 깨달아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느니라.

56 마음이 슬픔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에 치닫지 않는 사람, 정욕과 두려움과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확실한 깨달음에 이른 고행자라 부를 수 있도다.

57 그 어디에도 애착하지 않는 사람, 눈앞에 선이 나타나든 악이 나타나든 기뻐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깨달음은 확고부동이니라.

58 거북이 사방으로부터 네 발을 오무라들이듯이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감각을 끌어들일 때, 그때 그 사람의 지력(知力)은 흔들림이 없도다.

59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쇠약하게 만들 때 감각의 대상들이 그에게서 사라져가지만, 그것들을 바라는 갈망은 사라지지 않느니라. 그가 지고자(至高者)를 붙잡을 때 마침내 갈망까지도 사라지는도다.

60 현자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 카운테야여, 휘어잡을 수 없는 감각들이 억지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도다.

61 이것들을 단단히 틀어잡고서 요기(yogi)는 오로지 나에게 열중해야 하느니라. 자신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깨달음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로다.

62,63 감각의 대상들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한테서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솟아나느니, 애착은 열망을 낳고 열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마비를 낳고 마비는 기억상실을 가져다주고 기억상실은 이성을 파괴하고 이성의 파괴는 철저한 파멸을 이끄는도다.

64 그러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에서 떠나 아트만의 다스림을 받는 감각으로 감각-대상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단련된 영혼은 마음의 평화를 얻느니라.

65 마음의 평화는 모든 질병의 끝을 뜻하나니, 그 마음이 평온한 자의 깨달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로다.

66 단련되지 않은 사람은 깨달음도 헌신도 없나니, 헌신이 없는 자에게는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는 자에게는 어디서 행복을 얻을 곳이 없느니라.

67 그의 마음이 떠돌아다니는 감각을 좇아 치달릴 때, 바람이 바다 위의 배를 휩쓸어가듯이 그의 깨달음을 휩쓸어가는도다.

68 그러기에 오, 마하바후여. 사방에 널려있는 대상들로부터 모든 감각이 통제되는 사람은 어김없이 깨달은 사람이니라.

69 다른 모든 사람에게 한밤중일 때 단련된 영혼은 깨어 있고, 다른 모든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그때가 눈밝은 수행자에게는 밤중이로다.

70 갈망을 품어 기르는 자가 아니라, 강물로 채워지면서 결코 흘러넘치지 않는 대양(大洋)에 모든 강물이 스며들어 없어지듯이, 자기 안에서 모든 갈망이 없어진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발견하느니라.

71 모든 갈망을 벗어버리고 무심으로 행동하는 사람,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얻는도다.

72 오, 파트타여. 이것이 브라만의 품에 안식하는 자의 생태니, 이 상태에 도달한 그는 속지 않느니라.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는 순간에도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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