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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 스님 회곡록 1장 - 1편 - 4부
1장 마지막 비구(比丘)들

◈1편 - 죽음과의 첫만남 4부◈

이 학교는 내 젊은 시절에 기댈 곳 없는 삶의 큰 언덕이
되어 주었다. 대창학원 3학년으로 편입했던 그해,
한 밤중에 소리없이 아버지가 나타났다. 세상이 다 잠든
어둠속에서 도둑처럼 나타난 아버지는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고 말없이 가족들 얼굴만 바라보다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내가 커서 아버지의 얼굴을 똑똑하게
본 것은 이때 본 얼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그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보다 더 어릴때 보았던
아버지의 얼굴은 그사이에 잊어버렸기 때문에 낮선 사람을
처음 보는 것은 같은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내가 학교 다닌다는 말을 듣고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많이 배워라, 기상을 죽이지 마라..˝
이것이 아버지가 내게 해준 유일한 말이었다.

아버지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자 열한 살
이었던 나는 비로소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죽음에 쫒기면 살아야 하고 우리 또한 이처럼
깊은 고통의 바다의 잠겨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거대한 절벽처럼 눈 앞에 나타난 것
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대창학원에는 권영달이라는 선생이 있었다.그는 한글을 깊이
연구한 학자였는데,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해 틈만 나면 한글과
한국의 역사를 가르쳤다. 수업 도중에 시학(視學 : 장학관)이
오면 얼른 책을 숨기고 딴전을 피우다가 감시자가 떠난 후에
다시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권 선생을 통하여 비로소 아이들은 나라가 무엇인지를 어렴
풋이 깨달아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 가슴속에 묻힌 그 비밀은
큰 슬픔이었고, 아물길 없는 상처처럼 나이가 들 수록,
세상을 알수록 자라나고 더 크게 자라났다.

학교에 다니기는 했으나 편하게 공부나 하고 있을 처지는 아니
었다. 어머니가 품팔이를 했으나 그것으로는 가족들 입에 풀칠
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집안을 도와 살림에도 보탤겸 내 학비도
벌겸 도둑질 빼고 밑 천 없이 할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든
닥치는 데로 했다.

신문 배달도 하고 엿장사도 했다. 나중에는 둘째 형이 일하는
사방소의 막노동을 주로 했다. 사방소란 우리나라에 산림이 모조
리 헐벗어 홍수와 가뭄의 우너이이 되었으므로 이를 막으려고 산
에 아카시아 등 단기간에 자라는 나무를 심기 위해 지방마다 설치
해둔 기관이었다.

사방사업은 굶주린 농촌 사람들에게 노임을 살포하고 막노동의
일터를 제공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정책적 사업이었다.

5부~~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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