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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나의 베르테르여 / 이향아


슬픈 나의 베르테르여 / 이향아(시인, 호남대 교수)


아름다운 봄이었습니다.
모내기를 하기 전의 마른 논에는 진분홍 자운영 꽃이 눈이 부신 융단처럼 피어 있었습니다. 그 날은 아마 토요일이었을 겁니다. 나는 일찍 집에 돌아와 세수를 하고, 읽다가 접어 두었던 책을 펼쳤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한결같은 연정을 지루하리 만큼 끈질기게 지속하고 있는 베르테르, 젊은 베르테르가 슬퍼야 하는 것은 남의 약혼녀인 롯데를 사랑했지 때문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단할 수 없는 사랑의 진실성 때문인가. 나는 아름다운 계절, 아름답고 슬픈 사랑에 취하여 그 감미로운 고통 속에 오래오래 잠겨 있고 싶었습니다.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사랑이 부러웠습니다.
나는 앞으로 누구를 위해 죽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세상에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인가. 그는 누구일까? 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방에 있니?˝
문을 열어 보았더니 안숙 언니였습니다. 안숙 언니는 고등학교의 대 선배이며, 동네에서는 얌전한 처녀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너 잠깐만 우리 집으로 왔으면 좋겠어. 괜찮지?˝
˝네, 무슨 일인데요?˝
˝별일은 아냐. 혼자 있기 심심해서.˝
언니네 집은 바로 몇 집 건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안숙 언니였으므로 나는 쉽게 외출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선배로서 이런 말을 하기가 좀 난처하구나. 그렇지만 나도 중간에서 여간 곤란하지 않아. 가부간 말을 전해 줘야 할 것 같기에…….˝
안숙 언니는 정말 난처한 듯이 중간 중간 쉬어 가면서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렇게 하는 안숙 언니의 표정은 여전히 맑고 고왔습니다. 분홍 숙고사 깨끼저고리를 입은 언니의 어깨 위로 바람에 불리는 버들꽃들이 이리저리 옮겨 앉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낼 수는 없으나 야릇한 분위기가 느껴지면서, 이것은 어쩌면 남학생 얘기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내 가슴은 이상스럽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섣불리 앞지를 수도 없어서 숨막힐 듯한 그 분위기를 눌러 참았습니다.
˝너 혹시 상철이라구…… 알어? 찬양대에서…… 왜 그 테너 파트에 있는 …… 대학생 말야…….˝
나는 금방 ´상철이 말이죠? 얼굴이 뽀족하니 빼빼한 사람 아네요?´ 라고 말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글쎄요……. 잘 생각이 나지 않아요. 나중에 보면 알겠지요 왜요? 언니.˝
나는 내숭을 떨었습니다. 이야기 돌아가는 모습으로 보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요. 안숙 언니는 알든 모르든 우선 말부터 듣고 보라는 식으로,
˝사실은 그 애가 내 사촌 동생이거든. 그런데 널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나 봐. 친동생처럼 사랑하고 싶대. 벌써 몇 달째 고민하면서 나를 조르는 거야. 소개시켜 달라고 말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대답해 줘.˝
나는 아까보다 훨씬 활발해져서 얘기를 늘어놓는 안숙 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언니가 ´친동생처럼´, ´사랑´, ´소개시켜 달라고´ 등의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어 갈 때. 나는 그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고 천박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저 여자의 상식이었구나.´ 나는 안숙 언니가 시시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상철이.
나는 물론 그 학생을 잘 압니다. 가끔 늦게까지 남아서 찬양 연습을 할 때, 힐끗거리면서 사람을 보고 어쩌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굴이 빨개지곤 하는 남자. 이름만 찬양대지 노래를 제대로 하는지 음표나 알면서 따라 부르는지 의심하게 하는 남자. 그 행동거지로 보아서 뭔가 내게 색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막연하게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숙 언니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갑자기 그가 형편없이 유치해 보이면서 불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대학생이라면 한참 연하인 어린 내게 제 누나를 개입시켜서, 더구나 동생이니 오빠니 토를 달면서 접근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저는 아직 누구와도 그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요. 언니, 그렇게 전해주세요. 언니에게는 미안해요.˝
˝역시 잘 생각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다. 넌 역시 똑똑하다.˝
안숙 언니는 마냥 과장해서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갑자기 엄습하는 외로움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내게로 뻗쳐오던 따뜻한 불기운 하나가 사라진 다음, 썰렁하게 몰려드는 한기를 의식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참 이상한 감정이었습니다. 만일 상철이가 아니고 다른 사람, 아주 의젓하고 실팍한 청년이 있어 나를 거들어 주고, 나중에 생각하면 모두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지라도 ´인생이란´, ´고독이란´ ´사랑이란´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멋진 대사라도 외워 가지고 와서 나를 회유했더라면, 나는 황홀히 유혹에 빠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친동생처럼´, 그것이 설령 며칠로 끝나는 관계가 될지라도 나는 상철이와 같이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뒤로 한 열흘이나 지났을까? 상철이가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얌전한 학생과 갑자기 오빠 동생하며 가까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벌써 몇 달째 고민하면서 나를 조르는 거야´ 하고 하던 안숙 언니의 말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A가 없으면 B를 대용품으로 하고 B가 없으면 C라도 좋다면서 임시로 채우는 마음의 공허. 나는 하마터면 대용품이 될 뻔했던 것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습니다.
나는 그 뒤로 대학생이 여고생에게 어떤 추파를 던지는 것을 보면, 옛날 상철이에게서 느꼈던 못마땅함을 경험하곤 합니다. 뭔가 덜 떨어진 상급자, 미성년자를 유인하는 어리석은 성년을 보는 불안감이 거기 있습니다. 끼리 끼리에서는 소외당한 못난 상급생을 보는 측은함이 거기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내 편견일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완전히 편견이라고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안숙 언니 집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나는 곧바로 일기를 썼었습니다.

젊은 나의 베르테르여, 나는 당신을 슬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운명보다도 더 강하게, 그러나 서서히 오시는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다가 설령 내게 슬픔이 닥쳐올지라도 당신을 사랑함으로 베르테르여, 뜨거운 눈물로 당신을 사랑하는, 내 운명을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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