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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갈때 왜 욕심 못버렸나 / 안도현


그 섬에 갈때 왜 욕심 못버렸나 / 안도현(시인)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이라는 것쯤은 안다. 변산 해수욕장이며 직소폭포며 내소사를 한 번쯤 가 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리는 이름난 곳일수록 피서철에는 사람들로 미여터지기 일쑤다. 변산반도 쪽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변산반도의 막내 같은 아주 작고 호젓한 섬 하나를 알고 있다. 그 섬은 사실 나 혼자 숨겨 두었다가 혼자서만 살짝 만나고 싶은 애인 같은 곳이다. 그러나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발설해야겠다. 그 섬으로 들어가는 정기 여객선 같은 게 없다는 사실을 방패 삼아서 말이다. 변산반도의 고사포 해수욕장에서 보트를 타고 가야 하는데, 원불교 수련원에서 섬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여행객들이 쉽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섬의 모양이 새우처럼 생겼다고 해서 하섬(하도)이라고 부르는 섬이다. 하섬에는 자동차가 없고, 노래방이 없고, 호객 행위가 없고, 쓰레기 더미가 없고, 욕설과 고함이 없고, 구멍가게도 하나 없다.

십여 년 전, 친지들과 한 데 모여 하섬에 처음 갔을 때였다. 나무와 풀과 꽃과 바람과 파도와 저녁 노을만 있는 바위섬으로 간다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이것저것 챙기느라 부산을 떨었다. 사실 하섬에서 먹을 것과 잠 잘 곳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섬으로 떠난다는데 아무런 준비없이 가볍게 나설 수 없었다. 지금은 훌륭한 방갈로가 서 있지만 그 때만 해도 섬에는 작은 집 몇채가 전부였다. 숙박시설은 있다지만 이부자리가 염려돼 이불과 베개를 사람 수 대로 챙겨갔다. 또 삼시세끼 식사를 수련원에서 다 해결해 준다고는 했지만 어찌 먼 곳으로 놀러가서 밥으로 허기만 때울 수 있을까 싶었다. 술과 음료수와 과일과 고기에서부터 이쑤시개까지 메모를 해가면서 보따리를 쌌다. 마치 무인고도로 비장하게 들어가는 사람들처럼. 여인네들은 술 안주 한가지라도 더 짐 속에 챙겨 넣으려고 욕심을 부렸고, 남정네들은 비지땀을 흘리며 무거운 먹거리들을 날랐다.

그런데 그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간 게 화근이었다. 2박 3일 동안 먹어도 먹어도 가지고 간 음식들은 줄어들지 않는 것이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들고 간 수박들은 방 한쪽 구석에서 뒹굴었고, 피난민처럼 넣어 간 이불과 베개 보따리는 현지에 마련돼 있던 이부자리에 밀려 한 번 풀어 볼 겨를도 없었다.

우리는 결국 가지고 간 것들을 다시 챙겨 들고 섬을 나와야 했다. 배부른 쓰레기 봉지와 짐을 부여안고 뭍으로 나가는 보트를 기다릴 때였다. 원불교의 교무님 한 분이 조용히 다가와 합장을 하면서 말씀하셨다.

“다음에는 다 두고 오셔요.”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욕심과 미련으로 그렇게 바리바리 싸지 않고는 떠날 수 없었던 것일까.

섬에 가면 누구나 만사 제치고 거기서 며칠 더 머무르고 싶은 유혹에 빠지곤 한다. 제발 폭풍이라도 불어서 배가 뜨지 못했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해마다 하섬에 갔지만, 한 번도 일정을 미루어서 좀 더 머무른 적이 없었다. 밀려 있는 원고와 빽빽한 약속들이 섬에서 게으름을 피우도록 놔두지 않았고, 무심한 하늘도 사나운 폭풍 한 줄기 보내주지 않았다.

나도 올 여름에는 제발 섬에 가서 한 번 갇히고 싶다. 그래서 스스로 섬이 좀 되어보고 싶다.

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 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 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눈 밝혀야 하리
(졸시 「섬」 전문)


- 자료출처 : 조선일보 2000.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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