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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착한 여자˝ 중에서


* ˝더 우세요... 울 수 있다는 거 좋은 거예요. 막을 수 없는 거 막으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정인이 가만히 말했다.
인혜가 코를 풀다 말고 안경도 끼지 않은 눈으로 정인을 멍하니 바라본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해요. 노력해서 되는 일만 해요.노력해서 안 되는 일도 가끔 있거든요.˝
˝정인씨...˝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가만히 두 손을 가슴에 모으로 있으면 돼요. 가끔 떨어져서 내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면 알게 돼요. 세상은 신비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참으로 작은 존재라는 걸... 우리는 우주가 아닌 거예요.˝
˝정인씨 정말 많이 힘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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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하지만 서른이 반이나 넘어가는 요즘 나는 생각해.고시를 보고, 변호사가 되고 이런 게중요한 게 아니었꾸나 말이에요. 더 많은 여행을 떠나야 했고 더 많은 사람들과 길을 가며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고, 더 많은 술을 마시고 더 많은 강에서 수영을 했어야 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더 많은 남자와 연애를 하고 더 많은 실패를 했어야 했다고... 그래서 그 실패를 되새기면서 배워야 했었던 거야.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결혼하기 전에 아니, 하다 못해 엄마가 되기 전에라도...˝


* ˝정인씨 우린 엄마들이야... 우린 생명을 만들고 키우는 사람들이라구... 우린 쉽게 무너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야.
민정이가 처음 뒤집을 때 말이야... 알지요? 애기들 뒤집는 거... 걔들 맨 처음에 한 팔을 움직여 보았다가 그 다음엔 한쪽 다리를 옮겨 보았다가 그리고 용을 쓰기를 며칠, 그러다가 어느날 그만 몸을 뒤집어 보는 거야. 하느님이 유전자 속에서 다뒤집도록 입력을 해놓았는데 그게 그 애들한테는 그렇고 멀고 기나긴 시련인 거라구...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거... 그런 거예요, 어느날 홀연히 찾아오는 평화,
밤에 자고 아침에 눈을 뜨니 다가와 있는 행복 같은 건 없어요...
누구나 덜컹이면서 가는 거야... 정인씨 용기를 내서 나가요.우린 더 많은 강에서 수영을 하기로 한 사람들이잖아.˝


* 아이들이 놀다가 간 그네, 저만치 누군가 두고 간 로봇의 머리가 떨어져 있다. 아이는 집에 가서 저 얼굴을 찾겠지. 어쩌면 울고 떼를 쓸지도 모른다. 엄마는 집 안을 뒤집어 저 얼굴을 찾을 것이다. 소파 밑에까지 막대기를 넣어 휘이이 저어 볼지도 모른다.저 얼굴은 여기 있는데... 정인은 오각형의 로봇 머리를 바라본다. 열심히 찾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어디서 찾느냐도 중요한 것이다.


* ˝용건을 말씀하세요.˝ 정인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정인을 향해 가까이 갈 수 없는 소심한 사내가 멈칫, 했다.
˝정인씨는... 변했군요.˝
˝...˝
˝아까 처음 보았을 때 놀랐어요. 정인씬 변한 거 같아요.˝
˝그래요 변했어요. 살아야 했으니까요.˝


* 한때 방 안에 앉아 글을 쓰는 그의 안경을 벗겨내서 정인은 그것이 말갛게 될 때까지 열심히 닦아주곤 했었다.
- 안경이 맑아야 세상이 제대로 보일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때 그는 그런 정인이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곤 했었다. 하지만 정인은 이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이제 정인은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라는 걸.
그러니 어쩌면 자신에게 사람을 나쁘게 하는 저주가 붙어 있다는 말은 옳았는지도몰랐다. 그녀는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하잖은 것은 제가 할게요, 그런 힘든 일은 제가 할게요,귀한 당신은 거기서 가만히 계세요... 하고.
그녀는 그들의 할 일을 모두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 언젠가 귓가에 남은 음성에 대해 남호영은 말했었다.정인이 살던 집앞 호프집에서, 입술을 비틀며, 힘겹게 말했었다.
내 귓가에 남은 음성은 바로 내가, 나를 버리고 간 엄마를 부르던 그 목소리였어요... 그때 정인에게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엄마가 죽어요! 엄마가 저수지에빠져 죽어요! 소리치던 그 목소리...
그러므로 연민이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래서 그런 그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그를 편안히 잠들게 하고 그랬던 것은 사실은 누군가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던 그런 희망은 아니었는지.


* ˝하지만 이제 나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요, 당신을 사랑했다고생각했어요. 이 세상 남자를 다 가져다 준대도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지요.하지만 생각해 보니 내게는 당신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거예요, 미안해요, 저한테 속으셨던 거지요.
그래요, 미안해요. 저도 속았으니까요... 어릴 때 나는착한 아이였어요. 엄마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했지요. 그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요. 엄마, 내가 말 잘 들을 게, 날 좀 사랑해줘. 엄마, 내가 착해질게, 떠나간 아버지만 바라보지 말고 제발 날 좀 사랑해줘, 날 낳은 걸 후회하지 말아줘...날 버리고 죽지 말아줘, 제발!...
그리고 어른이 되었어요. 한 남자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런 거래를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시겠어요? 흥정 말이지요. 내가 착할게, 날 좀 사랑해줘, 내가 참을게.내가 노력할게. 내가 밥을 해주고, 내가 빨래를 해주고 밤늦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주고 술국을끓여주고 뭐든지 다 해줄게.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나를 때리고 나를 내팽개치고...
희망을 주었다가 그것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그걸 빼앗아가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도,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벼랑까지 날 밀어비린다 해도 내가 이를 악물고 참을 테니 제발 날 사랑해줘!그랬던 거지요.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건 거래였다는 말이지요...˝
정인은 남호영을 바라본다. 그는 굳어진 채로 정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 거래를 하는 나를 사람들은 착한 여자라고 부르더군요. 저는 이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어요.˝


* ˝남자가 애 키우며 혼자 사는 거 보는 거 짠하긴 하지... 그런데 정인씨도 수지타산을 맞춰야지.이제부터 영악하게 살 거라더니 그 결심 다 어디갔어? 호준이 아빠한테 돈을 더 받든가.˝
정인은 빙긋이 웃는다.
˝영악하게 생겨먹어야 그렇게 살죠... 예전에 우리 할머니 그렇게 없이 살 때도 동네 애들 끼니 때 오면 숟가락 하나 더 놓아주셨어요. 그렇게 사는 거 좋잖아요.˝˝정인씨... 정말 착한 여자야.˝
인혜가 착한 여자라는 말을 꺼내자 정인이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피식 웃었다.
˝착하다는 거 좋은 거잖아요... 다만 줄을 잘 서야지.˝
˝그래요, 줄을 잘 서야지.˝
인혜는 정인의 말을 따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서승희를 떠올린다. 인혜는 잠깐 생각에 잠기다가 담배를 물었다.
˝요즘 우리 법조계가 우리 둘이 사는 거 소문 났어요. 내가 남편하고 살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나? 정말 레즈비언으로 소문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나 요즘 남편들 심정 알 것 같애... 애들이 둘 더 오니까 정인씨가 예전보다는나한테 좀 소홀한 것 같고, 그래서 서운한 거 있죠?˝
두 여자는 웃는다. 인혜는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며 안경을 고쳐 올렸다.
˝요즘 느끼는 건데, 사랑이 문제인 거 같아. 내 친구들 중에 학교 다니던 시절에 학교가 떠들썩하도록 짜하게 연애하고 나서 조건 좋은 다른 남자랑 사는 애들 보면 잘 살거든. 애 둘씩이나 낳고 십 년 넘게 살면서 그 애들 요즘 만나면 그래...난 남편하고 정 없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아이들이 잘 산단 말이야.
정말 사랑이란게 뭔지... 난 차라리 여자들이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랑 잘 사는 게 더 나은 거 같아. 최소한 다른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지는 않잖아...
아니 방금 간 쟤 호준이 아빠 말이야... 쟤도 학교다닐 때부터 그렇게 정이많은 녀석이었는데 어디서 이상한 여자한테순정을 바치고 있더라구. 그러더니 결국 이렇게 딘거야.˝
인혜는 담배연기를 푸푸 하고 내뿜는다.
˝사랑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남에게 기대를 너무 많이 하는 거... 그게 문제겼지요.사랑한다는 건 내가 못 다 푼 한을 대신 풀어 달라고 남에게 기대를 하는 거, 안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자식이든 남편이든.˝
˝그래요... 정인씨가 언젠가 말했지. 산다는 거에 대해서 내가 너무 기대를 많이 했나 봐요.. 하구.나 요즘 그 말 많이 생각했다.
아니 그뿐은 아니구... 나 정인씨하고 요즘 같이 살면서 참 많은 걸느껴요... 우리가 여자들인 것에 대해서, 아 예전에는 왜 그렇게 내가 여자인 거 싫었나 몰라.하지만 이젠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부드럽고 따뜻하고 조용조용하고 그런 거,그건 너무나 소중한 거야.
언젠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도다, 하는 그말...예전엔 남자들이 강하고 날카롭고 떠들썩한 걸로 여자를 지배해놓고 미안하니까 그냥 폼 잡고 하는 말인 줄만 알았는데, 이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괴테가 정말 천재긴 천재인가 보다...
정인씨, 어때요? 우리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삶을 한번 다른 사람들하고 나누어 보지 않을래요?˝


- 공지영의 <착한여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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