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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러그를 뽑는 즐거움 / 나희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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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그를 뽑는 즐거움 / 나희덕(시인·조선대교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따금 나만 멀뚱하게 앉아 있을 때가 있다. 화제가 텔레비전 뉴스나 드라마 얘기로 바뀔 때, 나는 그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을 뿐더러 무슨 얘긴지 도통 알아듣지 못한 채 화제가 바뀌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겨울연가’의 인기를 그 드라마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고, 유행어를 들어도 그것이 어떤 광고에 나오는 말인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스카프를 멋지게 매거나 액세서리를 해도 그것이 어떤 연예인을 모방한 패션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는 미국을 강타한 테러가 일어났을 때에도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고 출근한 나는 오후가 되어서야 그 사실을 간신히(?) 알았다.
광주에 이사온 지 반년이 넘도록 텔레비전 플러그를 한 번도 꼽지 않았으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물론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게 되거나 식구들이 틀어놓은 화면에 잠깐씩 눈길을 주고는 한다.
그러나 내 손으로 텔레비전을 켜지 않게 된 것은 10년이 넘은 일이다. 그러니 1주일에 한두번 읽는 신문과 인터넷에서 접하는 약간의 정보가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끈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체 이런 정보치가 어떻게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다거나 어둡다는 인상을 그리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더라도 사회의 중요한 흐름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다만 조금 늦게 알게 될 뿐이고, 정보를 조금 덜 반복적으로 접할 뿐이다.
오히려 불필요한 정보를 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문제의 양상이 한눈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장점도 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려서인지 텔레비전이 없는 생활이 별로 답답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보던 때보다 내 일이나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좀더 얻을 수 있었으니 텔레비전이 주던 자유와는 다른 자유를 얻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차별한 정보의 폭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참호를 하나 만든 셈이다.
미국에는 ‘TV 끄기 네트워크’가 있어서 ‘TV 끄기 주간’을 선포해 그 운동을 확산시켜 가고 있다고 한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에 운동이나 독서를 즐기고 생각에 잠김으로써 삶이라는 화면을 새롭게 켜보라는 권유일 것이다.
그들이 제시한 통계를 보면 미국인이 하루 평균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이 4시간 이상이고 학생들이 연간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900시간인 데 비해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1,023시간을 넘는다고 한다.
텔레비전이 우리 삶에 얼마나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우리나라 통계를 보진 못했지만 적어도 이보다 덜할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문명이 우리 사회를 놀라운 속도로 잠식해가는 한켠에는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삶을 바꾸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이라는 책에는 텔레비전을 안보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모든 문명적 편리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스스로 먹거리를 생산하고, 옷을 직접 만들어 입고, 아기도 집에서 출산하고, 대중매체와 마우스로 움직이는 세계를 거부하는 그들은 최소한의 도구로 최대의 행복을 만들어내는 현대판 원시인들이다.
편리함이 곧 행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에게서 확인하게 된다.
평범하지만 치열한 그들의 삶에 비하면 내가 텔레비전을 물리친 정도의 파격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직도 내 방에는 얼마나 많은 플러그들이 꼽혀 있는가. 그 플러그들을 앞으로 얼마나 줄여나갈 수 있을지 나는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있다.
자신의 습관과 욕망을 제어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플러그를 뽑고 한달, 1년, 아니 10년을 즐겁게 지낼 수 있다.
이따금 사람들의 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는 어색함을 웃으며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시시콜콜한 드라마 얘기 다음에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해, 또는 뒷산에서 자신이 발견한 어떤 꽃에 대해 멋지게 들려줄 수 있다면.
(경향신문 2002년 0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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