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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수 없는 표창장


받을 수 없는 표창장 / 이선경


1970년을 생각하면 오래된 사진처럼 떠오르는 모습이 있습니다. 경기도 평택의 송북초등학교,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등진 채 어린 아이를 업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을 겨를도 없이 무용을 가르쳐주시던 1학년 3반 담임 홍종숙 선생님...

그날 저는 오후반이었죠. 일 나간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는데 학교 갈 시간이 다 돼도 엄마는 오지 않고 딱히 동생들을 맡길 만한 곳도 없고 생각다못해 어린 동생과 함께 학교에 갔습니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 가을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동생을 업고 등교한 저를 보고 선생님께선 조금 당황스런 표정이셨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셨습니다. 다른 선생님들 같으면 운동장 한켠에 동생들과 함께 두거나 집으로 돌려보냈을거란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선생님께서는 제 동생을 받아 업고는 ˝선경아, 너도 함께 무용연습 하는 거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정말이지 그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후로 선생님께서는 저희집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아시고 가끔 청소당번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급식빵을 남겨두었다가 제게 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께서는 받아쓰기 채점을 도와달라고 하시던지, 청소 후 뒷정리 등을 돕도록 했습니다. 빵을 가져가는 제 손이 부끄럽지 않도록 선생님께서는 늘 제게 뭔가 부탁하곤 하셨지요.

그날은 토요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께서 열 개도 넘는 급식빵을 건네며 마땅히 시킬 일이 없으셨느지 ˝선경이가 동생들도 잘 돌봐주고 선생님 일도 잘 도와줘서 교장선생님께서 표창장을 주셨는데 오늘은 토요일이라 상장은 나중에 주시려나 보다˝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아마 선생님은 제가 상장에 대해서는 곧 잊어 버릴 거라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저는 다음 주 월요일 조회시간에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면 바로 제 이름이 불려져 넓은 운동장, 많은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 앞에서 표창장을 받을 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1학년이 끝나고 새학기가 되어도 조회시간에 제 이름은 한 번도 불려지지 않았고, 그 사이 교장 선생님께서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지요. ´아마 선생님께서 책상서럽 깊숙이 넣어두고 잊어 버리셨나보다. 나중에라도 전해주시겠지.´ 그렇게 아쉬움을 달래며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상장´은 제 기억 속에 꼬리표가 되어 항상 남아 있었답니다.

그러니 선생님, 저는 얼마나 어리석었습니까? 어린 시절, 제 등에 업혀, 또 제 손을 잡고 학교에 따라온 동생들 만한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야 선생님의 그 마음을 알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초등학교 일학녀, 여덟 살바기 작은 계집아이의 자존심을 그렇게도 배려해주신 분. 이렇게 늦게라도 그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될 것을 선생님, 알고 계셨는지요?

제 희미한 기억 속에 선생님은 늘 삼십대 초반의 모습으로 서 계십니다.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단풍보다 더 오묘한 빛으로, 타들어가는 노을 속에 흰 모자 눌러쓰고 아이 업은 선생님이 그림처럼 서 계십니다.

˝일 더하기 일은 이... 기역에 아 붙이면 가.˝ 이 모든 것들을 선생님께 배웠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랑의 배려´를 제게 가르쳐주신 선생님.

삼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어느덧 제 기억 속의 선생님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저는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 중에 저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참으로 가슴이 뿌듯해옵니다.


(월간 샘터 99.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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