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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투리를 옹호함 / 안도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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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냈다. 경상도 말 중에서도 내 고향 말의 억양과 어휘는 아주 독특하다.
´아침 잡샀니껴?´ ´장에 가시더´ 와 같은, 누군가 ´니껴체´ 라고 이름을 붙인 그 말들은 내가 떠듬떠듬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늘 듣던 말들이다.
그런 억양을 내비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기라도 하면 마치 고향의 이웃집 ´아재´ 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진다.
이십대 초반부터 전라도로 옮겨와 살게 되면서부터 나는 고향의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한때 국어교사였기 때문에 표준어를 구사해야 했으며,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 을 전라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입과 혀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서울말이 각각 뒤섞여들어 그 어느 것도 온전하게 쓸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글을 쓸 때도 표준어 때문에 불편을 겪을 때가 많다. 특히 서울말을 중심으로 한 표준어 규정은 섬세한 표현의 자유를 간섭할 때가 많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전라도 말 중에 ´뜬금없이´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한글 워드프로세서 97 버전으로 치면, 그 밑에 어김없이 붉은 줄이 죽 그어진다.
한글맞춤법에 어긋난 말이라는 것이다. 컴퓨터란 녀석은 학교의 모범생과 같아서 표준어만 좋아할 뿐 방언이나 속어 따위를 인정하는 법이 없다.
컴퓨터뿐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를 만드는 서울 사람들도 방언에 인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원고에다 ´뜬금없이´ 라는 말을 쓰면 서울의 신문사 교열부 기자들은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느닷없이´ 라는 표준어로 바꾸어 버린다.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은 ´뜬금없다´ 와 ´느닷없다´ 가 똑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내가 보기에 ´뜬금없이´ 라는 전라도 말은 ´갑자기´ ´느닷없이´ 라는 뜻도 들어 있지만 ´엉뚱하게´ 라는 뜻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적어도 다급한 속도감이 없다.
이밖에도 ´싸묵싸묵´ 이라는 말은 내가 글 쓸 때 즐겨 쓰는 이곳 말이다. ´싸묵싸묵´ 행동하는 주체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데 이와 유사한 표준어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다.
´천천히´ 도 아니고 ´빨리빨리´ 도 아니다. 속도로 따진다면 아마 그 둘의 사이쯤에 있어야 하는 말일 것이다.
´징하게´ ´겁나게´ ´솔찮이´ ´새똥빠지게´ 와 같은 부사어는 또 얼마나 살가운가. 그리고 서울에 열쇠가 있다면 전라도에는 ´쇳대´ 가 있고, 서울에 누룽지가 있다면 전라도에는 ´깜밥´ 이 있다. 밥상 위에 놓인 ´찌금장´ 과 ´싱건지´ 는 또 얼마나 유서 깊은 방언들인가.
전라도 사투리와 관련된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어느 날 밤 보초병들의 암호가 ´열쇠´ 였는데, 호남 출신의 한 병사가 무심코 ´쇳대´ 라고 응답했다.
그래서 총을 맞게 됐는데 그 병사는 숨을 거두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쇳대도 긴디… ´ 누군가 한번 웃어 보자고 만든 농담일 터인데도 뭔가 비애의 냄새가 묻어 있지 않는가.
한때 전라도 말은 영화나 드라마에서조차 푸대접을 받아야 했던 때가 있었다. 지지리도 가난하게 사는 하층 민중들, 건달이나 사기꾼과 같은 비정상적 생활을 영위하는 등장인물의 입에서는 여지없이 전라도 말이 튀어나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드라마 ´모래시계´ 가 그 대표적인 예다. 정치적 오해에 의한 지역주의나 지역감정은 하루바삐 청산해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각 지역에서 두루 쓰이는 아름답고 그윽한 사투리들을 끌어안는 노력을 좀더 적극적으로 펼칠 필요가 있다.
불과 한세대 정도의 세월만 흘러도 어쩌면 사투리는 고색창연한 언어박물관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언어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모세대와 더불어 우리 사투리도 급격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그걸 말해준다.
특히 컴퓨터나 휴대폰 등이 대량으로 보급되면서부터 낯선 은어나 속어.비어, 그리고 신조어가 난무하는 때에, 우리 사투리를 찾아내고 지키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안도현 <시인>
- 2000/5/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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