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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 갈 게 없으니 그냥 가이소 / 성지혜


가져 갈 게 없으니 그냥 가이소 - 성지혜 / 소설가


여러 해 전,우리집에 강도가 들어 한동안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다.강도라니,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려들 일인데,실제 당하고 보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남편과 나는 장남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고,혼자 집을 지키던 노희가 강도와 맞닥뜨린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막내가 돌이 지나자,남편은 시골 형님에게 연년생 세 아들을 키우기 위해 가정부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냈다.일손이 달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정도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였다.한창 다니며 뛰놀아야 할 삼형제에겐 일일이 따라다니며 돌봐줄 보호자가 필요했다.남편 편지를 받고,시숙은 당신의 밤나무 농장이 있는,지리산 밑에 있는 여아를 소개받아 직접 데리고 상경하셨다.“제수씨,요즈음 부엌아이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입니더.본데없이 자란 아이라 맡기기도 영 성에 덜 차구먼요”

시숙 말씀처럼 처음엔 열세 살이라 너무 어리기도 하고 행동도 철이 없어 난감했다.하지만 아이들은 누나라 부르며 따랐고,3년쯤 지나자 노희는 일도 찾아서 할 줄 알았고 키도 자라 촌티를 벗어난 어엿한 도시 소녀로 변모해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들은 서울 반포아파트 1층에 살고 있었다.할 일을 끝내고 병원에서 무슨 연락이 올 것이라며 하마하마 기다리던 노희는 베란다에서 소리 없이 들어온 강도에게 덜미를 잡혔다.강도는 시퍼런 칼을 노희 가슴에 들이대며 협박했다.

“조용히 해.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새파랗게 질린 노희는 꿇어앉아 사정했다.

“우리집엔 가져 갈 게 없으니 그냥 가이소”

목숨이 경각에 달린 때,시퍼런 칼을 쥔 강도 앞에서 노희는 살려달라 애원하지 않고 우리집엔 가져 갈 게 없으니 그냥 가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병원까지 찾아간 우리 부부는 장남이 중환자실에 입원하지 않았다는 점과,그것이 삼형제가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는 틈을 노린 강도의 농간인 줄도 뒤늦게 알았다.그날 저녁,남편은 술에 취한 강도의 전화를 받았다.

“이상하지 않아요? 도둑질하러 간 내가,우리집엔 가져 갈 게 없으니 그냥 가라는 그 말에 녹아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 순진한 호소가 강도 마음을 움직여,강도는 도둑질을 포기하고 노희도 해하지 않은 채 비실비실 뒷걸음쳐 달아났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호소처럼 충직한 고백을 듣지 못했다.고명한 학자도 문필가도 아닌,수하에 부리는 소녀의 진솔한 호소는 나를 감동케 하여,그동안 마음대로 일을 부려먹은 걸 뉘우쳤고,예전보다 더욱 노희를 따스하게 대하는 동기가 되었다.

(성지혜 / 소설가)

- 2001/9/5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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