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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원시인 / 이화련


[괴물과 원시인] - 이화련 / 수필가

나는 가구나 집기에 이름을 붙이는 버릇이 있다. 듬직하게 생긴 책상은 ‘늠름이’,촉감이 부드러운 담요는 ‘보들이’,한 쪽 다리가 고장난 교자상은 ‘삐딱이’…. 주로 ‘이’자 돌림인데 그렇지 않은 게 하나 있다.‘괴물’이다. 아는 것 많고 지칠 줄 모르는데다,사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컴퓨터를 괴물이라고 하면 컴퓨터 공학도인 큰아들은 듣기 싫은 눈치다. 원고를 인쇄해야 되는데 다른 일로 바빠 그에게 부탁하면 못 들은 척한다. 바로 괴물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말이다. 남편은 아들보다 더하다.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바보라며,유치원 꼬마나 칠십 노인도 잘만 한다고 핀잔을 준다.

나와 달리 우리 집 남자들은 컴퓨터와 매우 친하다. 친한 정도를 넘어 중독증이 의심된다. 지난 설 연휴에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삼부자는 번갈아가며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 일단 그 앞에 앉으면 시간 개념을 상실하여,식탁에 세 남자를 동시에 불러 앉히는 일이 불가능했다. 어떤 매력적인 사람이 그들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을 수 있을까? 게임을 더 많이 하겠다고 부자지간에 옥신각신하니 컴퓨터는 역시 괴물이다.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끌기로 말하자면 나도 그들 못지않다. 고작 문서를 몇 장 작성하고 메일을 확인하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 컴퓨터 안이 미로 같기 때문이다. 다니던 길도 영 낯설고,마우스를 잘못 눌러 엉뚱한 곳을 헤매기도 한다. 심지어,며칠 전에는 컴퓨터가 꺼지지 않아 혼이 났다. 새로 산 신형 모델인데,배운 대로 해봐도,안내 책자에 쓰여 있는 대로 해도 소용없었다. 주말 부부인데다 아이들이 모두 외지에 있어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새벽이 되도록 괴물은 잠들기를 거부했고,본체에서 나는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이름 모를 짐승의 숨소리 같기도 한 소음이 신경 쓰여 나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최신형 마우스의 불빛은 충혈
된 짐승의 눈빛을 연상케 했다. 그만 전원 코드를 뽑아버렸다. 그 일로 나는 원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성능 컴퓨터를 겨우 타자기로 사용하는 원시인도 한심하지만,그 편리함과 재미에 빠져 밤잠을 설치는 사람도 걱정스럽다. 컴퓨터를 악용한 범죄는 더욱 큰 문제다. 급기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을 시켜 딸이 친어머니를 살해한 사건까지 발생했다. 내 생각에,그 딸이 컴퓨터를 몰랐다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범죄였다. 잠시 끔찍한 생각을 품었다 하더라도 직접 발품 팔고 다니며 어머니를 죽여 줄 사람을 수소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 손에 쥔 것이 마우스가 아니라 전화기였다면 목소리가 떨려 살인을 부탁하는 말 따위는 감히 내뱉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 아닌 컴퓨터 앞이었기에 순간의 생각이 클릭으로 이어지고,익명의 검은 가면 뒤에 도사린 악마의 유혹을 끝내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문명인을 구제할 방법은 무엇인가? 원시인은 그래도 세월 따라 진화할 희망이나 있지만….

국민일보[여의도 에세이] - 이화련 / 수필가
2002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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