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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파시즘 / 이명원
소설가 전혜성의 장편소설 <마요네즈>를 읽다보면 “가족은 안방에 엎드린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나도 그렇지, 어떻게 가족이 지옥일 수 있느냐고 점잖게 반문을 던지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장편소설인 <랩소디 인 블루>를 읽다보면 “가족은 흡혈귀”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이쯤 되면, 점잖게 반문하던 분들도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그래도 험한 세상에서 가족은 `유일한 피난처´가 아니냐”고 목청을 높이실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가족에 대한 이처럼 비관적인 인식을 많은 젊은 작가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유독 한국문학에만 나타나는 현상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가령, 프랑스의 젊은 소설가인 쥐스틴 레비의 <만남>이란 소설을 읽다보면, 자신의 어머니를 혐오한 나머지,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젊은 소녀가 등장한다. 일본의 소설가인 시마다 마사히코의 <드림 메신저>라는 작품에서는 아예 가족이 급진적으로 해체되어가고 있다는 설정 아래, `아이 대여업´이라는 신종사업까지 등장하고 있다. `아이 대여업´이라니? 고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한 회사에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아이를 구매한 뒤, 제한된 기간 동안 `의사-가족생활´을 한다는 식이다. 가족까지도 상품처럼 사고 판다는 소설의 설정이 자못 충격적일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현대적 가족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심각한 수준에 있다는 방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위에서 거론한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항은 현대 소설에 묘사된 `가족´이 흡사 묵시록적 소재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 묵시록´으로 규정할 수 있을 법한 새로운 유형의 소설이 집단적으로 창작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른바 묵시록적 관점에서 가족을 다루는 것은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작가들의 작품 속에 표현된 인물들의 `정신적 방황´이 구미 작가들의 그것에 비해서 유달리 밀도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단순화하자면, 구미의 소설들에서는 가족으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이 `성숙´의 주요한 도정으로 제시되는데 반해, 한국의 소설들에서는 그것이 많은 경우 편집증과 강박증을 포함한 정신적 병리현상으로 발전하는 예가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이득재 대구 효성카톨릭대 교수는 한국의 가족주의를 `가국체제´, 곧 가족과 국가의 논리가 끈끈하게 결합된 체제로 규정한 바 있는데, 이러한 주장에서 일말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곧 한국의 가족주의는 국가주의로 표상되는 집단주의의 하위구조라는 것이다. 때문에 지난 역사를 통하여 작동되었던 가부장적 `국가 파시즘´ 체제는, 가족단위 안에서 가부장적 `가족 파시즘´ 체제로 재생산된다. 그래서 국가폭력과 가정폭력은 쌍생아의 관계를 이루게 된 셈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소설의 작중 인물들이 `가족´에 대해 보이는 적의와 공포의 태도도 쉽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집단에 종속된 개인의 무기력함이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가족 파시즘´이라니? 표현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는 분도 계실 줄 안다. 천만에! 가족주의라는 미명 아래, 이 순간에도 가부장의 야만적인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짓밟히고 있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있다. 그들은 `가족 파시즘´ 체제 아래서 고통스럽게 신음하면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그들이 “흡혈귀”와 “지옥”을 소설이 아니라 현실의 가족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끔찍한 일이다. 가정폭력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인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국가 파시즘의 잔재와 가족 파시즘의 독소를 동시에 제거하는 일은 우리 시대 진보적 실천의 주요한 의제임이 분명하다.

한겨레 신문 <여론칼럼>
2002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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