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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수많은 ´나´ / 이경자


내 안의 수많은 ´나´ - 이경자 / 소설가

어제 결혼 생활 10년이 넘은 시 쓰는 후배와 만났다. 이제 마흔을 갓 넘긴 나이의 후배는 겉보기에 아름다웠다. 하지만 만나자마자 마구 사는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결혼생활의 어려움이 대부분이었다. 이혼하고 싶다는 하소연과 나는 어떻게 이혼하지 않고 살았느냐는 의문이었다. 저녁밥을 앞에 놓고도 먹는 것보다 ‘괴로움’에 더 신경을 썼다.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이혼하지 말라고 말했다. 후배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후배의 불만과 불평에서 내가 본 건 남편에 대한 사랑과 외로움이었다. 후배가 원하는 건 이혼이 아니라 더 큰 이해 더 깊은 사랑일 뿐이었다.

나는 선뜻 수긍하지 못하는 후배에게 말했다. 우리가 남편과 사는 동안 갈등에 시달리는 것은 딱히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남자와 사는 일의 어려움을 만든 수많은 경험을 들춰봐야 할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결혼생활에서 만들어진 집단적이거나 개별적인 무의식 같은 것.

그래서 우리는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무수히 많은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 아무 편견 없이 고정관념 없이. 어쩌면 내가 모르는 일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세 살 때 지켜본 어떤 강제 성추행. 아니면 어린 나에게 누군가 거칠게 성기를 자극했을지도 모르며 잔혹하게 매 맞는 어머니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성 경험이 파괴적이었거나 죄책감을 불러 일으켰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의 나를 차례차례 불러내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만져주어 보면 어느 순간 남편과 살아가는 일, 혹은 남성을 바로 보고 사랑하는 데 드는 공연한 어려움이 덜어지지 않을까.

나는 가끔 원시시대의 사람들 삶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그들에겐 헛된 제도나 편견들이 적어서 그만큼 자유로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기 위해 열어야 할 문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남성우월주의라는 문. 가부장주의라는 문. 여성비하라는 문. 여성착취라는 문 문 문을 지나야 겨우 진정한 남성에 다다른다. 대부분은 문을 열다 지치고 화가 나서 어느 문 앞에서 포기하고 만다.

아마 나의 후배도 어느 문 앞에서 그만 지치고 화가 나고 서러웠을 것이다. 물론 나도 아직 그 문들을 다 통과하지 못한 여자 중의 하나다.남성우월주의라는 문, 가부장주의라는 문, 여성비하라는 문, 여성착취라는 문, 문, 문을 지나야 겨우 진정한 남성에 다다른다.
(이경자/소설가)

- 2000/7/14 여성신문 5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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