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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쌀부대 |  | |
| 잃어버린 쌀부대
어린 시절 공부를 잘하는 오빠 덕분에 도시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어쩌면 내가 오빠 덕을 봤다기보다 수험생 오빠에게 밥을 해 주기 위한 수단으로 부모님께서 나를 오빠 곁에 두셨는지도 모르지요. 어쨌거나 우리는 시내 변두리에 허름한 방을 얻었고 가난한 오누이의 자취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일요일이면 오빠와 나는 땔감과 나물을 구하러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고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반찬을 가지러 갔습니다. 차비가 많이 들어서 집에 자주 갈 수도 없었지요.
쌀이 귀한 계절, 보릿고개라 불리던 이른 봄, 봄방학이 끝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의 식량을 아버지께서 지게에 지고 읍내로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날라다 주셨습니다. 읍내에 도착한 뒤에는 기차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에 오빠와 나는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열차 대합실까지 운반했지요.
오빠는 나에게 짐을 잘 지키라고 당부하고 기차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한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지요.
“꼬마야, 너 짐이 참 무겁겠구나. 아저씨가 기차에 실어 줄 테니 따라오너라.” “아저씨, 고맙습니다.” 이윽고 오빠가 기차표 두 장을 사 들고 와서 쌀부대가 어디 갔냐고 묻기에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오빠야, 어떤 힘센 아저씨가 기차에 옮겨 준댔다. 빨리 가 보자.”
오빠는 내 손을 이끌고 재빨리 플랫폼으로 나갔으나 쌀부대를 메고 간 아저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빠는 나를 한 마디도 나무라지 않고 “그 아저씨가 오죽 배가 고팠으면 우리 쌀을 탐냈겠나!”라고만 했습니다. 속 깊은 오빠는 부모님 걱정하실까 봐 그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지요.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객지에서 공부하는 자식들 위해 아껴둔 귀한 쌀이었는데 부모님이 아셨으면 얼마나 서러우셨을까요. 우리는 한 달 동안 밀가루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고 오빠는 도시락을 싸 가지 못해 번번이 점심을 굶었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그 시절 한창 잘 먹고 공부했어야 할 오빠가 얼마나 배고팠을까 생각하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미국에 사는 오빠입니다.
“이번 태풍에 피해는 없니?” 나는 다짜고짜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오빠, 그때 미안했어. 도시락 못 싸 주어서 점심 굶은 것.”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니?”
최옥생 님 / 부산시 서구 서대신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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