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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름일기
나의 여름일기



난 충남 공주시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랐다. 읍내에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고작 여섯 가구가 살았다. 삼면이 다 산으로 된 산골마을의 여름은 언제나 싱그러웠다. 짙푸른 나뭇잎으로 단장한 나무들이 꽉 들어찬 산에 바람이 스치듯 불면, 금세 짙푸른 초록 파도가 넘실대고, 스스스 바람소리가 마당까지 들려온다.



학교 가는 길가에는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풀숲에서 뛰어나온 청개구리가 가끔 앞길을 막고 나서 아는 체를 한다. 그 길에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면 나는 괜히 마음이 동해 포장이 안 된 흙길을 맨발로 내딛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젖은 흙을 밟고 걸으면 발에 닿는 촉촉한 감촉에 그 긴 귀가길도 지루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할 즈음 비가 그치고 다시 한낮의 땡볕이 내리쬐지만 엄마아빠는 또 들에 나가 계신다. 동생과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우려 감자밭에 나가 감자를 한 바구니 캐 큰 대야에 담고 얇은 수저로 껍질을 박박 긁어 내고 마당 한켠에 걸어 둔 솥 안에 넣고 불을 땐다. 그리고 나는 이른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집 앞 고추밭으로 달려가 싱싱한 풋고추를 한 바가지 따 온다. 그것을 씻어 손으로 반씩 뚝뚝 끊어 집에서 담근 간장에 넣고 조린다. 동생은 지금도 가끔 그 반찬을 먹고 싶어한다.



맛있게 잘 익은 감자를 한 바구니 가득 담고 수돗가에서 바로 받은 시원한 물과 열무김치 한 대접을 가지고 엄마와 아빠가 일 하시는 들로 새참을 가지고 나간다. 나무 그늘이 드는 밭둑에 앉아 먹는 감자의 맛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엄마가 돌아와 마당 한가운데에 놓인 툇마루에 저녁상을 보신다.



그때쯤 논둑에 소꼴을 베러 가셨던 아버지가 지게 가득 소먹이를 한 짐 지고 오신다. 그 모습을 본 누렁이가 벌써부터 음매음매 울어 대며 야단을 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누렁이에게 우선 풀 한 아름을 던져 주시고 수돗가에서 등목을 하신다. 시원하다를 연발하며 남동생의 손길에서 어느덧 많이 커 버린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며 대견해하시곤 했다. 난 그 곁에서 하루 동안의 농사일로 더러워진 아버지의 여름나기 필수품인 하얀 고무신을 철수세미로 닦아낸다. 늘 하얗게 닦아내는 내 솜씨에 아버지는 또 한번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아버지가 베어 오신 한 무더기 풀에 불을 지펴 모기를 쫓고, 풋고추 조림에 호박잎 쌈을 한 입 가득 담고 새콤 시원한 오이냉국을 한 수저 떠 먹으면 우리 일곱 식구는 더없이 행복했다. 저녁상을 물린 툇마루에서 밤하늘 별을 보노라면 그 황홀함에 빠져 달려들던 모기떼도 잊고 사춘기 소녀는 시인이 되어 가슴속에 또 하나의 시를 쓰곤 했다.



십오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고향을 떠나 있지만 기억만은 아직 고향에 두고 온 듯하다. 이런 소중한 추억이 있는 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노현정 님 / 경기 수원시 고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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