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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현두각 見頭角 |  |  |  | 
 |  | 현두각 見頭角
 
 [字解]
 見(나타낼 현)
 頭(머리 두)
 角(뿔 각)
 
 [意義]
 두각을 나타낸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 가운데 재능이나 역량이 유달리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出典]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
 
 [解義]
 묘지명(墓誌銘)이란 고인의 덕을 칭찬하여 돌에 새겨서 관과 함께 묻는 문장이다.
 《유자후묘지명》은 유종원(柳宗元)의 유언에 따라 한유가 쓴 것으로, 조상의 일로부터, 그의 아버지의 공적, 그리고 유종원에 대한 경력·성격·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유자후묘지명》의 일부분이다.
 
 ˝자후(子厚)는 젊어서 정민(精敏)하고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의 때에 이르러서는 비록 소년이라 할지라도 이미 스스로 성인이 되어, 능히 진사에 합격하고 참신하게 두각을 나타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씨 가문에 아들이 있다´고 하였다.˝
 
 자후(子厚)는 유종원의 자(字)이며, 유종원은 한유와 함께 중당(中唐)에 살던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한유와는 유종원이 관직에 있을 때 친교를 맺은 사이로 비록 한유가 나이는 다섯 살이나 연장자였지만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지기지우(知己之友)의 사이였다.
 한유는 이 묘지명에서 유종원이 젊은 나이에 일찍부터 재능이 남달리 뛰어났음을 일러 현두각(見頭角)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유종원은 21세 때 진사가 되고 26세 때 박사광사과에 합격하는 등 일찍부터 재능이 남달랐다.
 그러나 혁신적 진보주의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다가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나이 43세 때 호남성 영주의 사마로 좌천된 이후, 중앙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47세 때 다시 광서성의 유주자사로 명해져, 거기서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오랜 변경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원숙하게 하였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그의 문장이 내용과 형식에서 미증유의 경지를 열게 된 것도 모두 그의 불우한 정치생활 중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유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도한 그의 문장은 《문장궤범(文章軌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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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문운동 古文運動]
 
 중국 한문학에서 사륙변려문을 배척하고 선진(先秦) ·양한(兩漢) 때 고문(古文)을 부흥시키고자 한 운동이다.
 보통 중국 산문은 문장 구성의 기본인 한자의 특성에 따라, 간결미 ·암시성 ·장식성 등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그리고 문장 형식은 선진 때 《논어》 《맹자》 《장자》 《순자》 《한비자》 등 제가의 의론문(議論文)에서 기틀이 잡히고, 한대(漢代)에는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 《과진론(過秦論)》 등과 같이 논책문(論策文)과 좌구명(左丘明)이 지었다는 《춘추좌씨전》, 사마 천(司馬遷)의 《사기》 등에 쓰인 서사문으로 발전하였다.
 
 이때까지도 문장의 기본 형식은 기록과 의사전달이 주목적이어서 장식성보다는 간결미와 암시성이 추구되었다.
 그러나 육조(六朝)시대에 들어와, 중국 산문은 현저하게 장식성을 띠게 되었다.
 이는 불교의 전래로 불경 번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중국어의 음운이론이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중국어의 성률미(聲律美)도 추구하게 된 때문이었다.
 따라서 육조시대에는 4 ·6, 4 ·6으로 글자를 배치하여 그 리듬을 이용한 산문을 즐겨 쓰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륙변려체 문장이며, 사륙문(四六文)이라고 약칭한다.
 
 그 후 산문 격식이 점차 엄정해져서 배우대구(排偶對句)는 물론, 사조(辭藻), 음률의 화해(和諧) 및 전고(典故)의 사용까지도 따지게 되어, 산문의 생리인 사상 ·감정의 표현 ·전달이나 사실의 기록에는 불편한 형식으로 굳어졌다.
 이에 다시, 문체상 선진 ·양한 시대의 문장 형식과 내용의 전통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것이 고문부흥운동이다.
 따라서 고문과 변문(변文)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 운동은 위진육조(魏晉六朝) 이래 성행한 변려문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문부흥운동이 제창되고, 성공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변려문이 지나치게 교유주작(矯蘭做作)하고 도공도식(徒工塗飾)에만 치중하여, 정당한 의사와 정서의 표현 ·전달을 둘째로 미루었기 때문이다.
 
 또 이는 한말(漢末)부터 위진시대에 걸친 사회 혼란을 틈타 민간에 퍼지기 시작한 외래 불교사상에 대항하여, 침체하였던 유학의 전통을 다시 찾고, 이를 선양하기 위한 문풍(文風) ·문체 및 문학언어의 개혁운동이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당(唐)나라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등에 의하여 열매를 맺어 산문문학의 주류가 되었고, 변려문은 공문 서식에만 쓰이게 되었으나, 그 운동의 근원은 육조시대 중엽까지 소급한다.
 즉, 위제(魏帝)의 제묘(祭廟)에서, 우문 태(宇文泰)가 소작(蘇綽)에게 명하여 《대고(大誥)》를 짓게 한 것이나, 수문제(隋文帝) 때 이악(李具)이 당시 문단을 휩쓸던 제(齊) ·양(梁)의 화미(華美)한 문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주한 예는 고문부흥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결실되지 못하였으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사륙변려의 기풍이 계속되었다.
 당대에도 한유 ·유종원 등에 앞서, 유면(柳冕)이 선구적으로 고문운동을 제창하였으나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당무제(唐武帝) 때 진자앙(陳子昻)이 또한 육조 변려문풍(폿儷文風)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그 목표가 시가(詩歌)에만 국한되어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대에 이르러, 소영사(蕭穎士) ·이화(李華) 등이 적극 배기(俳綺)를 배척하고 자연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여 고문부흥운동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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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궤범 文章軌範]
 
 중국 송대(宋代)의 산문선집(散文選集).
 남송(南宋)의 사방득(謝枋得) 편찬. 초학자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문장 69편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주로 당(唐)나라의 한유(韓愈) 31편, 유종원(柳宗元) 5편, 원결(元結) ·두목(杜牧) 각 1편,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 12편, 구양수(歐陽修) 5편, 소순(蘇洵) 4편, 범중엄(范仲淹) ·이구(李쁑) ·이격비(李格非) ·신기질(辛棄疾) 각 1편으로, 당(唐) ·송(宋)의 고문파(古文派) 작가에 한정하였다.
 그 밖에 삼국시대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전출사표(前出師表)》와 진(晋)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포함시킨 것은 편자인 사방득이 송나라의 충신인데다 송나라가 멸망한 후에 이 책을 편집했기 때문에, 이 두 편의 글을 통해 자신의 우국(憂國)과 은일(隱逸)의 심사를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편자는 채택한 문장의 배열에서도 내용에 따라 사진(仕進) 전과 사관(仕官) 후의 언행 방법을 나타낸 것으로부터 용퇴(勇退) ·낙도(樂道)의 뜻이 담긴 것에 이르기까지 그 순서를 알맞게 잡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구문(構文) 연습법의 단계도 싣고 있다.
 이 책은 원(元) ·명(明) 이후에 인기가 높아 왕양명(王陽明)이 그 서문을 쓰기까지 하였다.
 
 [出處]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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