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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見之明(선견지명)
先見之明(선견지명)

[字解]
先(먼저 선)
見(볼 견)
之(갈 지)
明(밝을 명)

[意義]
닥쳐올 일을 미리 아는 슬기로움을 뜻한다.

[出典]
후한서(後漢書) 권84 열전(列傳)제44 양표전(楊彪傳).

[解義]
삼국(三國) 시대, 조조(曹操)의 휘하에 양수(楊修)라는 주부(主簿)가 있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는데, 심지어는 조조의 마음까지도 알아 맞추었으므로, 이 때문에 항상 자신만만해 하다가, 결국은 죽임을 자초하고 말았다.

어느 날, 조조는 새로 지은 화원(花園)을 둘러보게 되었다.
조조는 화원을 둘러보고 나서 화원의 문에 ´활(活)´이라는 한 글자를 적어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났다.
화원을 만들었던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어서, 부랴부랴 양수를 찾아가 물었다.

양수는 웃으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문(門) 위에 쓰인 ´활(活)´자는 곧 ´활(闊)´이 됩니다. 조승상께서는 화원의 문이 너무 넓은 게 싫으셨던 것입니다.˝
화원을 만들었던 그 사람은 양수의 설명대로, 화원의 문을 조금 좁게 고쳤는데, 얼마 후 찾아온 조조는 문을 보더니 과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조조는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의 재간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업성(업城)으로 가게 하는 한편, 비밀리에 성을 지키는 관리에게는 그들의 통과를 허가하지 말라고 명령해두었다.
그 결과 조비는 성문에서 통과가 저지되었으나, 조식은 양수의 계책을 이용하여 성을 지키는 관군(官軍)을 죽이고 성문을 통과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처음에 조조는 조식의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하였으나, 얼마 후 조식이 양수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몹시 화를 내며 양수를 미워하게 되었다.

조조는, 양수의 재능이 뛰어난데다가 원술(袁術)의 조카라는 사실 때문에, 후환이 두려워 그를 죽여버렸다.
양수가 죽자, 그의 부친 양표는 몹시 비통해하였다.

어느 날, 조조가 양표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찌 이렇게 야위셨소?˝

양표가 대답하였다.
˝저는 부끄럽게도 한 무제의 신하였던 김일제와 같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지지 못하여 자식을 죽게 하였습니다만, 이제는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표의 말에 조조의 안색이 바뀌었다.

* 彪(무늬 표) 操(잡을 조) 簿(장부 부) 闊(트일 활) 丕(클 비) 植(심을 식).

[類似語]
深思遠慮(심사원려:심사숙고(深思熟考)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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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선견지명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따님이 왕위를 계승하니(632), 이분이 바로 신라 최초의 여자 임금인 제 27대 선덕여왕이다. 처음엔 신하들이나 백성들도 여자라 하여 미심쩍어 했지만 곧 여왕의 지혜와 혜안에 탄복하여 마음으로 따르게 되었다. 선덕여왕의 선견지명이 어느 정도인가는 다음 세 가지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 한번은 당나라 태종의 붉은 색, 자주 색, 흰 색의 세 가지 색깔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 석 되를 신라에 보내왔다. 찬찬히 그 모란꽃 그림을 보고 난 여왕은,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단정하듯 말하였다. 옆에 있던 신하들은 왕이 왜 저런 말을 하는가 의심하며 수근거렸다. 선덕여왕은 그 낌새를 알고도 아무 말 없이 꽃씨를 궁궐 뜰에 심으라고만 하였다. 마침내 꽃이 피었다. 그러나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질 때까지도 과연 향기라고는 없었다. 신하들이 여왕의 선견지명에 놀라 물었다. ˝어떻게 향기가 없을 줄 아셨습니까?˝ 여왕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향기있는 꽃에는 나비가 모이는 법, 헌데 꽃을 그린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이는 꽃에 향기가 없음을 말함이 아니겠느냐. 당나라 임금은 이것을 보내 내가 여자로서 짝없이 혼자 지낸다고 업신여긴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 추운 겨울날 영묘사라는 절 마당의 옥문지라는 연못에서 난데없이 개구리 떼가 몰려와 3~4일을 계속해서 울어댔다. 여왕은 즉시 신하들에게 군사 2천을 뽑아 서쪽 교외의 여근곡을 찾아가 적병을 죽이라고 했다. 신하들은 왕명을 받고서 긴가민가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 근교로 향했다. 가서 물으니 과연 부산아래에 그 모양이 여성의 생식기를 닮은 여근곡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다. 그 골짜기에는 여왕의 말대로 백제 군사 5백명의 숨어 있었다. 신라 군사들은 좌우에서 기습하여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잡아 죽였다. 여왕의 혜안으로 위기를 모면한 뒤 신하들은 모두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이렇게 설명했다. ˝개구리가 성난 꼴을 하고 있는 것은 곧 군사를 상징함이요, 옥문지의 옥문이란 여근을 말한다. 여자는 음양으로 따지면 음에 속하며 그 빛은 희니, 흰 빛깔은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의 군사가 서쪽에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 이래서 적병을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이말을 들은 신하들은 비길 수 없는 왕의 지혜에 오직 탄복할 뿐이었다.

세 번째 이야기. 선덕여왕의 예견력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할 정도였다.
왕이 아무 병도 없이 건강할 때 였다. 하루는 신하들을 앞에 놓고 말했다.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그때는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시오.˝
신하들은 건강한 왕이 죽는다는 얘기를 하는 데다, 도리천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옥황상제가 있는 하늘이라 그런 곳이 어딘가 어리둥절해 하였다. 그러나 왕은, ˝도리천이란, 낭산의 남쪽 비탈이니라.˝ 하고 일러주었다. 왕이 예언한 그날이 오자 과연 왕이 죽고 말았다. 신하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신하들은 왕이 일러준 대로 낭산 남쪽 비탈에 장사지냈다.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문무왕이 즉위하여 낭산 남쪽 선덕여왕의 능 아래 사천왕사를 세웠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 하늘 아래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바로 선덕여왕이 예언 한 대로였다.

참고자료: 일연과 함께 떠나는 삼국여행(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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