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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措火積薪(조화적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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措火積薪(조화적신)
[字解]
措(둘 조)
火(불 화)
積(쌓을 적)
薪(섶나무 신)
[意義]
불을 장작더미 밑에 두다라는 뜻으로 매우 큰 위험(危險)이나 재난(災難)이 숨어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出典]
서한(西漢)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
[解義]
가의(賈誼)가 문제의 아들인 양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에 임명되었던 시기, 문제는 비록 황제였지만, 동성(同姓) 제후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믿고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권한도 크게 약해졌다.
가의는 이러한 시대적 폐단을 간파하고, 황제에게 치안책(治安策)이라는 글을 올렸다. 가의는 이 글에서,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제북왕(齊北王) 유훙(劉興)의 반란, 문제의 친동생인 회남왕 유장(劉長)의 모반, 오왕 유비(劉비)의 반항 등이 암암리에 대역죄인들을 받아들이는 일을 열거하고, 이를 분석하며 말했다.
˝ .... 지금 많은 사람들은 천하가 태평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는 마치 불을 땔감을 쌓아두는 곳의 아래에 두고, 그 위에서 잠을 자면서 불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것을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일시적으로 편안함을 꾀하는 것입니다[夫抱火措之積薪之下, 而寢其上, 火未及燃, 因謂之安, 偸安者也]. .... ˝
문제는 가의의 건의를 수용하여, 최대의 제후국이었던 제(齊)나라와 회남국을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분할하며,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가의에게서 학문을 배우던 양회왕이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에 가의는 상심하여 관직을 버리고 지내다가 이듬해에 죽고 말았다.
위의 내용은 가의의 《신서(新書)》 수령(數寧)편에도 실려있다.
*賈(값 가) 誼(옳을 의) 梁(들보 양,량) 懷(품을 회) 비(물소리 비) 抱(안을 포) 措(둘 조) 寢(잠잘 침) 燃(사를 연) 謂(이를 위) 偸(훔칠 투).
[同意語]
積薪措火(적신조화).
[反意語]
曲突徙薪(곡돌사신:http://kr.encycl.yahoo.com/print.html?id=701884).
[參考]
가의(賈誼: 기원전201-169)는 서한(西漢) 낙양(洛陽)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제가(諸家)들의 전적(典籍)과 학설에 정통하였으며,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재위) 때 박사(博士), 태중대부(太中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가의는 복장의 색깔과 예악(禮樂), 법제(法制) 등을 수정하거나 제정하였으나, 정사(政事)에 대한 비판의 글을 자주 올려 대신들의 시기를 받았다. 가의는 장사 태수로 좌천되었다가, 문제의 아들인 양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에 임명되었다. 가생(賈生)이라고도 하며,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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