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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 이야기 -한지- |  | |
| 이번에는 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볼랍니다.
예전에 종이는 채륜이 만든 것이 아니고 개량 한 것이라 해는데요. 이 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고 물증에 의한 결론입니다.
채륜이 종이를 개량한 시기는 후한시대로 기원 후 105년 전후입니다. 그러나 여러 유적이나 그 밖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그 시대 이전의 종이들이 발견되었답니다. 그 중에는 로프노르지(발견자의 이름을 붙인 듯..)는 기원전 210년에서 0년 사이에 제조된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 밖에 파교지, 금관지, 중안지, 마권만지, 방마탄지 등이 있는데 모두가 채륜 이전의 종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 들은 중국에서 나는 것들이고요. 우리나라의 종이의 역사는 어디까지 갈까요?^^
삼국시대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제지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기원후 105년은 우리 고구려의 태조왕 53년에 해당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국초부터 문자를 가지고 있었고 시사를 기록한 유기라는 책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초부터 종이를 만들었다는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의 전례 시기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백제또한 제지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것 같으나 정확한 기록이 없는 실정이고요...
신라시대에는 기록이 좀 있는 편입니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종이를 제일로 여겼는데 그 중 하나가 신라의 백석무지와 견지, 아청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이들의 원료나 제조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경덕왕 31년에 쓰여진 대방광불황업경에 닥나무를 가지고 종이를 만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아시죠? 이것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데요 이것 또한 신라에서 만든 종이가 확실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인쇄만 우리나라에서 하고 종이는 중국에서 만들었다고 우기는 학자들이 좀 있는 것 같더군요. 다라니경의 샘플을 얻어 연구를 하면 누구 말이 맞는지 금방 알 수 있지만 워낙 귀한 것이기에 박물관이나 문화재를 관리하느 곳에서 샘플을 새끼 손톱의 반의 반만큼 정도 주는 것이 고작이니.....하지만 워낙 귀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지요.
우리나라의 종이가 명성을 얻은 것은 대부분 신라의 종이입니다. 그러나 기록에만 존재하고 그 실물이 적은 것은 우리나라 고분은 그 구조의 결함으로 식물성 섬유가 장기간 보존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후가 워낙 뚜렸한 탓도 있고요.
그래도 신라시대의 기록물들이 좀 발견 되었는데 대부분이 일본사람들이 가져 갔다고 하는 군요.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행방을 이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고려시대로 넘어 가면........
고려는 대장경을 많이 만들었죠? 그 말은 인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이렇듯 인쇄가 활발히 이루어지니 종이의 수요도 많았고요 그러다 보니 종이를 만드는 장인들은 어느정도 신분의 보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고려의 종이를 역사상 최고의 종이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자고로 명필은 붓은 가리지 않지만 종이는 가린다고 했습니다. 중국 송대의 내노라 하는 학자나 명필들이 고려지를 애용했다지요^^
그리고 고려의 종이는 고려피지라는 별칭으로 불리어 졌으며 원나라때에는 십만장의 종이를 조공으로 요구할 정도로 종이의 질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고려지는 애석하게도 일본에 있습니다. 일본의 나량동대사에 소장 되어 있다고 하는 군요.
이제 조선으로 넘어가면......
솔직히 조선시대에는 발전이 없는 쇠퇴의 시기였습니다.
모든 상공업이 이 시대에는 쇠퇴했지요...심지어는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제지법을 배워 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다면 좋지만 조선의 장인들은 반 노예적인 분위기에서 일을 하다 보니 기술의 발달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난리를 겪으면서, 조공의 비리등등.....기술의 발달은 고사하고 오히려 장인들의 수는 적어지고 말았답니다.
조선시대의 종이의 특징은 투박하고 질긴 것인데 예전의 섬세했던 한지의 멋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관에서 제지를 전매하며 제지 법이 발달하지 못해서랍니다.
갑자기 조선시대 상공업의 쇠퇴를 말했더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군요...
옛날에 우리나라에 사발포라는 섬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는데요 그 섬유가 굉장히 얇고 부드러워 한필을 위에서 늘어뜨리고 놓으면 한개의 사발(국이나 물을 떠 놓는)에 들어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과장이 좀 있겠지만.........
그런데 이 것은 임금님에게만 바치는 것인데, 지방의 관리, 그 위의 관리, 또 그 위의 관리......이렇듯 중간에 빼돌리려는 사람들 때문에 이 사발포를 만드는 사람(여자들)은 너무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열필을 만들면 되는데 50필, 100필을 만들어야 하니까......
일이 너무너무 힘들고 그래도 나라에서 하라고 시키니까 해야되는 것이고
그러다 딸이 태어나면 싫어도 되물림 되어지고........
결국은 이 사발포를 만드는 집안에 딸이 태어나면 아기때 손가락을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커서도 베틀질을 못하도록.......
이러다 보니 결국 사발포라는 것은 이름만 전해지고 그 기술은 영원히 우리땅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by http://cafe.daum.net/bigmemor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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