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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뢰딩거 |  | |
|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물질의 파동이론과 양자역학의 다른 기초들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영국의 물리학자 P. A. M. 디랙과 공동으로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06년 빈대학교에 입학했고 잠깐씩 떠나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1920년까지 그곳에 계속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군대에 복무했으며 그뒤 1921년 취리히로 가 그곳에서 6년을 보냈다. 취리히에서 이론물리학자로서 창조적 업적을 내기에는 상당히 늦은 나이인 39세 되던 1926년의 6개월 동안 양자파동역학의 기초를 세우는 논문들을 썼다. 이 논문에서 그는 행성천문학에서의 뉴턴의 운동방정식과 같이 양자역학에서 기본적인 방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의 역학에 대한 편미분 방정식을 기술했다. 1924년 물질 입자들이 이중성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드 브로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러한 체계의 행동을 파동방정식으로 기술하는 이론을 도입했다.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解)는 뉴턴 방정식의 해와는 달리 물리적 사건들의 확률적 발생에만 관련된 파동함수들이다. 절대적이고 쉽게 가시화되는 뉴턴의 행성 궤도의 사건들의 결과가 양자역학에서는 훨씬 더 추상적인 관념인 확률로 대체되었다(양자이론의 이 측면은 슈뢰딩거를 비롯한 다른 몇몇 물리학자들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으며, 자신이 그렇게 힘들여 창조한 이론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해석에 대한 반론들을 정식화하는 데 나머지 생의 대부분을 보냈음).
1927년 그는 양자 가설의 창안자인 막스 플랑크의 뒤를 이어달라는 베를린대학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쟁쟁한 교수진의 일원이 되었다. 1933년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국가의 정책이 되자, 그는 방랑을 시작해 7년 동안 오스트리아, 영국, 벨기에, 로마의 폰티피칼 과학 아카데미, 마지막으로 1940년에는 수학자였다가 정치로 방향을 바꾼 P. E. 데벌레어러가 세운 더블린 고등연구소로 전전했다. 슈뢰딩거는 그후 15년간 아일랜드에 머물면서 물리학과 과학철학 및 과학의 역사에 대해 연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를 써서 양자역학이 유전구조의 안정성을 설명하는 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슈뢰딩거가 이 책에서 말해야 했던 내용의 많은 부분이 나중에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의해 수정되고 확대되었지만 그의 책은 이 주제에 관해 가장 유용하고 심오한 개론서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1956년 은퇴하고 빈으로 돌아와 빈대학교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슈뢰딩거는 그 세대의 모든 물리학자들 가운데에서도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다. 그는 서양의 언어들로 된 모든 문학과 철학에 능통했고, 그가 어릴 때 배웠던 영어로 쓴 그의 대중과학 저술들은 그런 종류들 가운데 최고였다. 그의 〈자연과 그리스인 Nature and the Greeks〉(1954)에 요약된 고대 그리스 과학과 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는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과학적 세계관에 감탄했고 인간 존재의 궁극적 신비를 밝혀주는 유일한 도구로서 과학이 적합한지에 대해 의심했다. 그 자신의 형이상학적 입장은 마지막 책 〈나의 세계관 Meine Weltansicht〉(1961)에 표현된 것처럼 베단타의 신비주의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특출한 재능 덕분에 그는 일생을 통해 과학과 철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고, 이는 이런 학문분야들의 전체 흐름이 점차 기술적으로 전문화되던 시기에 거의 독보적인 업적이었다.
by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o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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