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드 브로이 |  | |
| 프랑스의 물리학자.
양자론에 대한 연구와 전자의 파동적 특성을 발견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초기생애
프랑스 귀족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노르망디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그 성(姓)을 따온 브로이 집안에서는 17세기부터 고위급 군인, 정치가, 외교관이 나왔다. 루이 드 브로이가 그의 형 모리스(그가 죽은 후 루이는 공작 지위를 물려받았음)와 함께 과학을 직업으로 선택한 것은 집안의 전통을 깨뜨린 것이었다. 역시 물리학자이자 원자핵의 실험적 연구에 주요한 공헌을 한 모리스는 파리에 있는 가족의 저택에 장비를 잘 갖춘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는 때로 그의 형과 함께 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그를 매료시킨 것은 순전히 물리학의 개념적인 측면이었다. 그는 ˝실험가나 기술자보다는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견해를 사랑하는 순수 이론가의 정신 상태를 더 많이 가졌다……˝고 스스로를 묘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에펠 탑의 무선국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그로서는 드물게 물리학의 기술적 측면에 접했다.
원자물리학의 ´신비´라고 그가 부른 것(이를테면 과학에서 해결되지 않은 개념적 문제)에 대한 관심은 형으로부터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프랑크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대해 들었을 때 생겨났다. 그러나 물리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기로 결심한 것은 훨씬 뒤였다. 18세에 소르본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학위도 받아서(1909) 가문의 전통을 따라 외교관이 되려고 했다. 심각한 갈등기를 거친 다음 그에게 부과되었던 프랑스 역사연구 계획을 포기하고 물리학에서 박사논문 주제를 선택했다.
전자파동 이론
이 박사논문(1924)에서 그는 그의 혁명적인 전자파동 이론을 전개시켰는데, 이것은 이미 그가 과학 학술지에 발표했던 것이었다. 원자 규모의 물질이 파동의 성격을 가진다는 생각은 아인슈타인이 20년 전에 한 제안에 근거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파장이 짧은 빛은 어떤 조건에서는 입자로 이루어진 것과 같은 효과를 낼 것이라고 제안했는데, 이 생각은 1923년 콤프턴 실험과 1925년 보테-가이거 실험을 통해서 확증되었다. 하지만 빛의 2중성은 드 브로이가 그 개념을 물질에까지 확장시켜 적용했을 때 과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의 제안은 원자 내부에서 전자의 운동에 대한 계산으로 인해 제기된 문제에 답해 주었다. 전자는 핵 주위를 돌아야 하고 그당시에는 모호했던 어떤 이유로 인해 운동이 제한을 받는다는 점이 실험에 의해 드러났다.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가졌다는 그의 생각은 그러한 제한된 운동을 설명해 주었다. 핵전하가 부과한 경계 내부에 제한된 파동은 그 모양과 운동에 제한을 받게 되는데, 이는 원자의 경계에 맞지 않는 모양의 파동은 스스로 간섭을 일으켜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23년 그가 이 생각을 처음으로 내놓았을 때 전자의 입자적 성질은 실험에 의해 잘 확립되어 있었지만, 전자가 어떤 조건에서는 복사 에너지와 같은 성질을 나타낸다는 데 대한 실험적 증거는 없었다. 따라서 그의 제안은 직관의 승리였다.
´ 물질파´라는 그의 생각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그것은 다른 과학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박사학위 논문 1부를 아인슈타인이 읽게 되었는데, 그의 반응은 매우 열광적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드브로이의 업적의 중요성을 터놓고 강조하는 한편, 그의 논의를 보다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그 가설적인 파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개념을 기반으로 그는 후에 물리학의 필수적인 도구가 된 파동역학이라는 수학적 체계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1927년에 이르러서야 미국의 클린턴 데이비슨과 레스터 저머, 스코틀랜드의 조지 톰슨이 전자의 파동적 성질에 대한 실험적 증거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후기활동과 저술
박사학위를 받은 후 소르본대학에 남아 1928년 새로 설립된 앙리 푸앵카레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1962년 은퇴할 때까지 이곳에서 강의를 계속했으며 1945년 이후에는 프랑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고문으로 일하기도 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 외에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쓴 그의 과학저술들로 인해 1952년 국제연합 경제 및 사회 회의가 주는 칼링가상을 받았다. 영국 왕립학회의 외국인 회원이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었으며, 그의 몇몇 선조들처럼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 회원이었다.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함축성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은 연설·기사·책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서 중심적인 질문은 원자물리학에서 근본적인 통계적 고려가 근저(根底)에 있는 원인에 대한 무지를 반영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측정 행위가 측정되는 대상에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그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후자가 옳을 것이다. 1923년 이후 약 30년간 드 브로이는, 근저에 있는 원인은 최종 감각으로 묘사될 수 없다는 생각을 견지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통계적 이론은 ˝우리의 실험기법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변수들 뒤에 완전히 결정된, 그리고 확인할 수 있는 실재를 숨기고 있다˝는 그의 초기의 신념으로 되돌아갔다.
by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obel/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