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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졸리오 퀴리 부부 |  | |
| 프랑스의 물리화학자 부부.
인공적으로 만든 새로운 인공 방사성 원소의 발견으로 1935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했다. 이들은 노벨상 수상자였던 퀴리 부부의 딸과 사위이다. 이렌 퀴리는 1912~14년 콜레주 세비네에서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준비했고 1918년 파리대학교의 라듐 연구소에서 그녀 어머니의 조교가 되었다. 1925년 폴로늄의 알파 선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같은 해 어머니의 실험실에서 졸리오를 만났는데, 그녀는 졸리오가 과학·스포츠·인문주의·예술에서 자기와 관심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료임을 알게 되었다. 리세 라카날의 기숙 학생으로서 프레데리크 졸리오는 공부보다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물리화학공업학교의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라부아지에 시립학교에서 무상 공립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학학위를 받으면서 물리화학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군복무를 마친 후 그는 연구 장학금을 받았고 물리학자 P. 랑주뱅의 추천을 받아 1925년 10월 이렌의 어머니인 마리 퀴리의 조교로 들어갔다. 1926년 10월 9일 프레데리크와 이렌은 결혼했다.
졸리오는 1927년 이학사 학위를 얻기 위해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고 동시에 수입을 늘리기 위해 샬레 전기공업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이렌 퀴리의 지도를 받아 실험기술을 배웠다. 1928년 처음으로 그들은 과학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연구과정중에 그들은 붕소·알루미늄·마그네슘을 각각 알파 입자로 충돌시켰으며 그결과 질소·인·알루미늄과 같이 보통 방사성 원소가 아닌 원소들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얻었다. 이 발견으로 화학적 변화와 생리적 과정을 추적하는 데 인공적으로 만든 방사성 원소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러한 응용은 곧 성공적으로 나타났다. 갑상선에 의한 방사성 요오드의 흡수가 검출되었고 방사성 인(인화염의 형태)의 진행과정이 유기체의 대사과정에서 추적되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원자핵의 생성으로 이들 핵이 붕괴되어감에 따라 원자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수단을 얻을 수 있었다. 졸리오와 퀴리는 그들이 연구하던 변화들에서 중성자와 양전자가 생성되는 것도 관찰했다. 이들의 인공 방사성 원소 발견은 원자 에너지 방출의 문제 해결을 향한 중요한 단계였는데. 이는 우라늄 분열을 일으키는 충돌에서 알파 입자 대신 중성자를 사용한 E. 페르미의 방법이 졸리오 퀴리 부부가 인공적으로 방사성 원소들을 만들 때 사용한 방법을 확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1935년 졸리오 퀴리 부부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들의 합성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뒤 이들은 소(Sceuaux) 공원 근처에 집을 마련해 이사했으며, 마리 퀴리 때부터 대학 동료들이 모임을 가졌던 아르쿠에스 곶의 브르타뉴에 있는 집에 다니러 갈 때를 제외하고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폐가 나쁜 이렌을 위해 1950년대에는 쿠르슈벨 산맥에 가기도 했다. 1937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명된 프레데리크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준비하는 데 연구 활동의 일부를 할애했다. 아르키에-카샹과 이브리에 정전가속기를 건설하고 콜레주 드 프랑스에 수백만V(볼트)짜리 사이클로트론(유럽에서는 소련 다음으로 2번째 만들어진 장치임)을 건설하는 것을 감독했다. 이렌은 그들의 아이들인 헬렌과 피에르를 키우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렌과 프레데리크는 그들의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 고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1934년 사회당에, 1935년 파시즘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경계위원회에 참여했다. 1936년에는 스페인 공화당의 편을 들기도 했다. 이렌은 1936년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한 3명의 여성 중 한 명이었다. 과학연구 부서의 정부 차관으로서 그녀는 J. 페랭과 함께 나중에 국립과학연구소가 된 단체의 기금마련을 도왔다. 퀴리 부부는 모든 것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졸리오-퀴리 부부도 인공 방사성 원소들의 발견에 대해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나치즘의 부상에 따른 걱정과 연쇄반응의 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위험 등을 고려해 출판을 그만두었다. 1939년 10월 30일 그들은 원자로의 원리에 대한 기록을 봉투에 넣고 봉인했는데, 이는 과학 아카데미에 맡겨졌으며 1949년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 프레데리크는 가족과 함께 점령된 프랑스에 남아 그의 실험실에 들어온 독일인들이 자신의 장비나 연구결과를 이용할 수 없도록 지키기로 결심했고 이 장비들을 독일로 가져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연구를 계속했는데 특히 생물학에 집중했다. 1939년 이후 프레데리크는 A. 라카사뉴와 함께 방사성 요오드가 갑상선에서 추적자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레데리크는 1943년 의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복자들에 대한 투쟁에 프레데리크는 점점 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1940년 11월 랑주뱅의 투옥을 비난했으며, 1941년 국민전선위원회의 성립에 참여했고 이 위원회의 회장이 되었다. 1942년 봄 이론물리학자 J. 솔로몬이 나치에 의해 사형된 후 프레데리크는 프랑스 공산당에 참여했고 1956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과학자들에게 연구 증명서를 발급해줌으로써 그 연구결과가 독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산업회사인 인공방사성원소응용연구회사를 설립했다. 1944년 5월 이렌과 아이들은 스위스로 피난갔으며 프레데리크는 장 피에르 고몽이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살았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그의 실험실은 파리 해방을 위한 전투중에 폭탄을 제조했던 장소였으며 무기고로도 사용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군인에게 주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3등장에 지명되었고 무공십자훈장도 받았다. 1944년 해방 이후 프랑스에서 프레데리크는 과학 아카데미에 선출되었고 국립과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그뒤 1945년 드골 장군은 프레데리크와 군수장관에게 프랑스를 위해서 1939년에 이들 부부가 이룬 발견들을 응용할 목적의 원자력위원회 설립을 위임했다. 이렌은 행정관리로서 그녀의 과학적 경험과 능력을 원료 취득, 우라늄 조사, 추적장치들을 건설하는 일에 헌신했고 1946년 라듐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프레데리크의 노력은 1948년 12월 15일 ZOE(zéro, oxyde d´uranium, eau lourde)의 전개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는 프랑스 최초의 원자로로서 힘은 약했지만 앵글로색슨의 독점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난 냉전과 반공주의가 절정이었던 1950년 4월 조르주 비돌 총리는 아무 해명도 없이 고위 감독관의 직위에서 프레데리크를 해임시켰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이렌도 원자력위원회 위원직을 박탈당했다. 그후 이들은 실험실에서의 연구와 강의 및 여러 평화운동에만 전념했다. 1950년대 몇 번의 수술을 거쳤지만 이렌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1953년 5월 프레데리크는 간염이 생겨 5년 동안 이 병으로 고생했고 1955년에는 심각하게 재발하기도 했다. 1955년 이렌은 과학연구진들이 파리의 연구소보다 자유로운 조건에서 대규모 입자 가속기를 가지고 연구할 수 있도록 파리 남쪽의 오르세대학교에 새로운 핵물리학연구소를 세울 계획서를 작성했다. 1956년초 이렌은 산으로 요양하러 갔지만 그녀의 건강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백혈병으로 쇠약해져 다시 퀴리 병원에 입원했고 1956년 그곳에서 죽었다. 병에 걸린데다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던 프레데리크는 이렌이 끝내지 못한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자기 지위를 고수하면서 동시에 1956년 9월 이렌이 죽음으로써 비어 있던 파리대학교의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그는 오르세 연구소의 설립도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1958년 이 연구소에서 연구가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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