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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퀴리 |  | |
|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물리학자.
방사능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H. 베크렐과 그녀의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함께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1911년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는 등 노벨상을 2번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비범했던 그녀는 16세에 러시아 고등중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치면서 금메달을 받았다. 수학·물리학 교사였던 아버지가 투자를 잘못해 돈을 잃었기 때문에 그녀는 교사자리를 얻어 일을 해야 했으며 동시에 여성 노동자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치면서 민족주의자의 ´자주강좌´에 비밀리에 참여했다. 18세에 가정교사직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불행한 연애사건을 겪었다. 마리는 나중에 언니 브로냐가 그녀를 도와준다는 합의 아래 자신의 수입으로 파리에서 의학공부를 하는 언니를 도와 주었다. 1891년 마리는 파리로 가 소르본대학교에서 P. 아펠, G. 리프만, E. 부티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J. 페랭, C. 모랭, A. 코통 등 이미 잘 알려진 물리학자들을 만났다. 그녀는 학생기숙사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했으며 실제로 빵과 버터와 차만 먹고 살았다. 1893년 1등으로 물리과학 학사자격을 얻었고 그후 리프만의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해 1894년 2등으로 수리과학 학사자격을 얻었다. 그해 봄 그녀는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그들의 결혼(1895. 7. 25)으로 인해 폴로늄(마리가 자신의 모국을 기념하여 그렇게 불렀음)과 라듐의 발견 등 세계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성취하게 될 협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학위 논문의 주제를 찾고 있던 마리 퀴리는 H. 베크렐이 발견한(1896) 새로운 현상(그녀는 후에 이 현상을 ´ 방사능´이라고 불렀음)에 접하고 우라늄에서 발견되는 성질이 다른 물질에서도 발견되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G. C. 슈미트와 같은 시기에 토륨의 경우에도 같은 성질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광물질을 조사하면서 역청 우라늄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역청 우라늄광은 순수한 우라늄보다 방사능이 큰 광물질로 방사능이 매우 큰 소량의 알려지지 않은 물질의 광석에 존재한다는 것으로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가 착수했으며 새로운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으로 이어진 연구에 피에르 퀴리가 참여했다.
피에르 퀴리가 주로 새로운 복사(輻射)를 물리적으로 연구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동안 마리 퀴리는 금속상태에서 순수 라듐을 얻기 위해 애썼는데 피에르 퀴리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화학자 A. 데비에른의 도움으로 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연구 결과 그녀는 1903년 6월 과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피에르와 함께 왕립학회의 데이비 메달을 받았다. 또한 1903년 그들은 방사성을 발견한 공로로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두 딸 이렌(1897)과 이브(1904)의 출생도 그녀의 열성적인 과학 연구를 방해하지 못했다. 세브르에 있는 여자고등사범학교의 물리학강사로 임명되었으며(1900) 그곳에서 실험적 증명에 기반한 교수법을 도입했다. 1904년 12월 피에르 퀴리가 지도하는 연구실의 책임조교로 임명되었다. 피에르 퀴리의 갑작스러운 죽음(1906. 4. 19)은 마리에게 쓰라린 충격이었지만 그녀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그 이후로 그들 부부가 수행하던 과학 연구를 홀로 완성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았다. 1906년 5월 13일 남편이 죽은 후 공석으로 남아 있던 교수직에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소르본대학교의 첫번째 여교수가 되었다. 1908년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다.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으며,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마리 퀴리는 딸 이렌의 도움으로 ´X선 사진법´(X-radiography)의 이용법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1918년 이렌이 합류한 라듐 연구소는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핵물리학과 화학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이제 최고의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1922년부터 의학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어 방사성 물질의 화학적 성질과 이를 의학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1921년 두 딸과 함께 미국 여행을 했는데 W. G. 하딩 대통령은 그녀에게 미국 여성들이 모금하여 마련한 1g의 라듐을 선물했다. 그녀는 특히 벨기에·브라질·스페인·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강연을 했다. 국제연맹위원회는 그녀를 국제지적협력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밖에 파리에 퀴리 재단이 만들어지고 1932년 언니 브로냐가 소장인 바르샤바의 라듐 연구소가 개관되는 것을 만족해했다.
마리 퀴리의 뛰어난 업적 중 하나는 질병 치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핵물리학 연구를 풍부하게 지원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방사성원을 축적할 필요를 이해한 일이었다. 그결과 비축된 방사성원은 1930년 입자가속기가 출현할 때까지 비할 데 없는 도구였다. 수년에 걸쳐 라듐 D와 폴로늄이 축적된 1.5g의 라듐이 파리 라듐 연구소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은 1930년경 수행된 실험과 특히 이렌 퀴리가 1926년 결혼한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함께 수행한 실험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연구로 J. 채드윅 경에 의해 중성자가 발견되고 결국 졸리오 퀴리에 의해 인공 방사능이 발견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뒤 몇 개월 후 마리 퀴리는 복사작용으로 생긴 백혈병으로 죽었다. 2회의 노벨상 수상으로 그 중요성이 드러난 그녀 자신의 연구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의 핵물리학자와 화학자에게 미친 영향으로 보아 물리학에 대한 그녀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by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o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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