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글 나누기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비스마르크(1815-1898)
독일의 정치가.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학을 전공한 후, 1847년 프로이센 의회 의원이 되어 초왕당파 소속으로 3월혁명에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1851년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서 출석하여 오스트리아와 대항하였다. 1859년 페테르스부르크, 1862년 파리 주재 대사를 지내고, 빌헬름 1세에게 소환되어 동년에 수상이 되었다. 철혈 연설을 하여 의회와 충돌을 일으켜 헌법 투쟁을 하였고, 의회를 무시하고 군비 확장을 강행하여 [철혈재상]이란 명칭이 붙었다. 1863년에는 실레스비히,홀시타인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덴마크를 공격하였다. 1866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로 군비 확장의 성과를 과시하였으며, 의회와도 화해하여 소독일주의에 의한 독일 통일의 기초를 굳게하고 1870년-1871년의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1871년 2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를 독일 제국의 황제로 하는 대관식을 올리고, 스스로도 독일 수상이 되었다. 통일을 완성한 후 그 육성에 전념하고 외교와 동맹에 수완을 발휘하였다. 즉, 1877년 러,터 전쟁에는 [공평한 중개인]을 자처하여 베를린 회의를 주최하고 3제 동맹, 3국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의 고립을 꾀했다. 이러한 복잡한 외교망은 카프리비 이후 점차 간소회되어 빌헬름 2세에 의해 무장 평화의 유지는 깨졌다. 내정에 있어서는 1872년 이후 중앙당, 남독일의 카톨릭을 상대로 문화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곤혹에 빠졌으며,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는 한편 사회 보장 제도를 마련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힘썼으나, 1878년 이후 자유 무역주의를 버리고 보호 관세주의를 채택하였다. 이로 인하여 여당이었던 국민 자유당과도 멀어졌다. 그는 처음에는 식민지 획득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1880년대초부터 적극성을 띠어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에 약간의 식민지를 획득하였다. 1890년 3월 빌헬름 2세와 충돌하여 사임한 다음 1398년 ´회고록´을 저술하였다.



by http://social.netian.com/human.htm
 
비즈폼
Copyright (c) 2000-2025 by bizforms.co.kr All rights reserved.
고객센터 1588-8443. 오전9:30~12:30, 오후13:30~17:30 전화상담예약 원격지원요청
전화전 클릭
클린사이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