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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폴레옹 (1769-1799) |  | |
| 프랑스의 황제(1804-1814). 코르시카 태생.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 혁명을 맞아, 한때 코르시카에 돌아가 독립 운동에 참가했다. 후에 혁명 전쟁에 참가하여 툴룽 항 탈환의 포병 지휘관(1793), 이탈리아 전선의 여단장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테르미도르 9일 사건이 일어났을 때 로베스피에르 파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나, 석방 후 왕당파의 폭동을 진압(1795.10.5)하였으며, 보아르네 장군의 미망인 조세핀과 결혼하였다.(1796.3) 이탈리아 군 사령관이 되어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고 캄포포르미오 화약을 체결, 명성을 떨쳤다. 다음에 영국과 인도와의 연락을 끊기 위하여 이집트에 원정(1798-1799), 카이로에 입성했는데, 그 뒤 총재 정부의 위기가 닥치자 단신으로 귀국,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 통령이 되었다. 뤼네빌, 아미앵 양조약의 체결로 평화를 회복하고, 콩코르다, 나폴레옹 법전(1804)등으로써 구프랑스와 혁명 프랑스를 부르조아지와 토지 취득 농민의 선에서 균형을 취해 안정시키고, 1804년 5월 황제가 되어 12월에 대관식을 가졌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그 체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근대적 국민군과 군사 생산력은, 혁명 전쟁의 계승로서의 유럽 지배를 위해 투입되었다. 트라팔가 해전(1805.10.21)에 대패하여 영국 본토 상륙 작전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누르고 대륙 봉쇄령(1806)을 발포했으며, 틸지트 화약(1807), 에스파냐 점령으로 봉쇄권을 확대하였다.1809년 조세핀과 이혼하고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 이 기간이 그의 전성기로서 사실상 전유럽을 지배하고, 형제나 근신을 각국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프랑스는 대륙 봉쇄의 영향으로 경제적 불황에 빠졌고, 러시아는 반항적으로 프랑스 상품에 과세하고, 대륙 봉쇄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1812년 5월 7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 원정을 시작했으나, 9월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고도 러시아의 초토 작전과 추위의 맹위에 견디지 못하고 후퇴, 12월 니이멘 강을 건넜을 때에는 원정군의 병력은 거의 괴멸되고, 라이프찌히에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의 연합군에게 패배(1813.10.16)한데다 에스파니아에서 영국군이 북상하여 3월말 파리가 함락되고, 엘바 섬에 유배되었다. 루이 18세가 복위한 후 1815년 2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남프랑스에 상륙, 파리에 입성(백일 천하)하여 제위에 올랐으나, 워털루 싸움에서 패전(6.18)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1821.5.5)
by http://social.netian.com/human.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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