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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천 |  | |
| 대각 국사 의천은 왕자로 태어나 10 세에 출가(집을 떠나 스님이 됨)하고, 36 년 동안 스님으로서 오로지 도를 닦고 끊임없이 불교를 널리 전하며 살다가 47 세에 입적ㆍ수도승의 죽음을 이르는 말)했다.
참다운 구도자의 삶이었다.
그는 아버지 고려 문종과 어머니 인예 태후 이씨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후, 자는 의천, 대각 국사는 그의 시호(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려 임금이 내린 이름)이다.
문종이 어느 날 네 왕자를 불러 놓고 물었다.
˝누가 스님이 되어 나라가 잘 되길 빌어 주겠느냐?˝
의천이 나서서 뜻을 밝혔다.
˝아바마마,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문종은 기꺼이 허락했다. 1065년, 왕은 자신의 스승인 난원을 불러 의천의 머리를 깎게 했다. 머리를 깎은 의천은 난원을 따라 개경의 영통사에서 생활하게 됐다. 그 때 난원은 66 세의 노승이었다.
의천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학문을 쉬지 않았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어쩌다 머리털이 이다지도 희었는가? 학업의 수고로움 쌓이고 또 쌓인 탓이지´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18 세 때에는 세자를 대신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긴 교장의 수집을 강하게 주장하는 글을 지었다. 이것은 그 뒤 1086년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해 ´속장경´ 등의 불전을 판에 새겨 4000여 권이나 펴내는 계기가 된다.
의천은 또 1084년 정월에 대궐로 들어가, 둘째 형인 선종에게 송나라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오고 싶다는 뜻을 간곡히 아뢰었다. 선종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했지만 모두 반대했다. 왕자인 의천이 송나라에 들어가면 요나라가 트집을 잡아 문제를 일으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1085년 4월 8일 밤에 의천은 왕과 태후에게 편지만 남긴 채 제자 몇 명과 함께 정주(오늘날의 김포)에서 상선을 타고 송나라로 떠났다.
그 후 1 년 남짓 송나라에 머물며 여러 고승들을 만났고, 3000여 권의 불교 책을 모아 가지고 다음해 6월에 돌아왔다. 송나라에서 만난 고승들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은 화엄종의 정원과 천태종의 종간이었다.
의천은 송나라에서 돌아온 해에 흥왕사의 주지를 맡았다. 흥왕사는 2800 칸의 건물에 항상 1000여 명이 생활하는 고려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1089년 국청사 건립에 착수하는데, 이는 곧 천태종의 첫 출발을 뜻한다.
의천은 해인사로 물러났다가 다시 흥왕사로 오게 되고,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했다. 이로써 의천은 천태종을 우리 땅에 바로 세우려는 오랜 염원을 이루게 된다.
의천은 백성들의 편한 경제 생활을 위해 ´돈을 만들어 쓰자´는 주전론을 폈다. 그 때에는 쌀과 베가 화폐 구실을 했는데, 그것은 교환과 운반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101년 4월, 돈을 만드는 일을 맡는 주전도감이 설치됐고, 이듬해 12월 해동통보가 비로소 만들어져 실제로 사용됐다.
하지만 의천은 1101년 10월 5일에 입적, 해동통보를 구경하지 못했다. 그 때의 나이 46세였다. 당시 대각 국사의 이름은 송나라뿐만 아니라 요나라와 일본에도 퍼져 있었다. 일생을 불교 연구에 바친 대각 국사는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신라 불교, 특히 원효 불교를 이으려고 했으며, 고려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불교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편제종교장총록´ㆍ´원종문류´ㆍ´석원사림´ 등의 책을 남겼다.
by http://fori.new21.net/history/main.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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