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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건 |  | |
|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통일신라 후기 금성태수 왕융과 어머니 한씨 사이에서 877년 출생했다.
통일 신라 후기의 혼란한 상황은 견훤과 궁예로 하여금 후백제와 태봉을 건국하게 하고 후 삼국의 혼란한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단서를 제공했다. 후삼국시대 주인공의 한 명인 궁예 는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는 신라의 왕자로서 정권 다툼에 희생이 되어 지방으로 몰려났고 승려가 된 사람이다.
그 는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가 세상이 혼란해진 때
기훤에게 투신했고, 후에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양길 밑에서 궁예는 강원도와 황해도 일대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확보했고, 양길 을 타도하고 송악을 근거로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한반도 중심부의 패자가 된 궁예는 철원 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마진으로 정하고 후에 태봉으로 바꾸었다.
왕건은 송악 지방의 호족출신으로 패강진, 혈구진 등 신라 변경에 설치된 군진의 무력을 바 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궁예의 예하 장군으로서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900년에 광 주, 충주, 청주 및 당성, 괴양 등 여러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이 되 었다. 왕건은 특히 서남해 공략에 큰 공을 세웠다.
903년 3월 왕건은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을 공격, 함락시켰다. 서남해의 점령은 후백제의 중국, 일본과의 통로를 막 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전은 왕건이 일찍부터 해상활동에 익숙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 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 해에 그 동안 쌓 은 전공으로 알찬으로 승진했고, 913년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그 후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고, 도읍 을 송악으로 옮겼다. 그가 도읍을 옮긴 것은 송악이 자신의 본거지였고, 뒷받침해주는 호족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게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안으로는 왕위에 오른 후 얼마되지 않아 환 선길, 이흔암 등이 반역사건을 일으키는 등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해야 했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밖 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송악이라는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왕건은 탄력성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 왕건이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 안정책이었다. 그는 신라 말기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제도를 실 시했다. 동시에 왕건은 신라 말기부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적극 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왕건은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했으며, 각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왕건은 라이벌이었던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 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 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다.
왕건은 대외적으로 신라와 후백제에 대하여 다른 정책을 썼다. 신라에 대해서는 친화정책 을 썼다. 견훤의 후백제를 타도하기 위한 것과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 를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920년 10월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왕건은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 고,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관계가 됐다. 왕건은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신 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왕건은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화친과 전투 양면정책을 썼다. 고려와 후백제와의 군 사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 지역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왕건은 고창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했 다.
왕건은 935년 후백제의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 하게 대우했으며, 또 같은해 10월에는 신라 경순왕의 자진항복을 받았다. 마침내 936년 견 훤을 앞세운 고려의 군대는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을 통일했다.
<훈요십조>
태조 왕건은 통일 직후 <정계> 1권과 <계백료서> 8편을 친히 저술하여 반포했다. 현재 전하 지 않는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 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하여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그리고 왕건은 죽기 얼마 전 대광 박술희를 내전으 로 불러들여 <훈요십조>를 받아적게 하여 그의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이 <훈요 십조>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① 국가의 대업이 제불의 호위와 지덕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② 사사의 쟁탈 ·남조를 금할 것,
③ 왕위계승은 적자적손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 을 것,
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⑤ 서경을 중시할 것,
⑥ 연등회 ·팔관회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⑦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⑧ 차현 이남 금강 이외의 산형지세는 배역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⑨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⑩ 널리 경사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등이다.
by http://fori.new21.net/history/main.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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