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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장보고의 자는 정집이며 궁복 또는 궁파라는 다양한 이름이 있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러 가지 이름 중 정식으로 쓰인 것은 ‘장보고’이 다. 그의 출신은 완도 태생의 천민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수영에 능숙 하고 무예가 출중했다고 전한다.
<청운의 꿈을 안고 중국으로>
장보고는 14살 때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
같이 갔던 친구들 중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친구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노예 생활에 지쳐 목숨을 잃었다. 그는 당나라 서주 땅에 건너가 온갖 시련 속에서 검술을 익혔고, 무과에 급제하여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 절도사를 두었는데 장보고는 이 시기에 지방군벌의 속성과 그들의 군대 양성 방법에 대한 이해를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친구인 정년과 함께 산동성 등주를 자주 찾았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양자강 하구 지역에서부터 북으로는 등주에 이르는 지역 일대에 신라인들이 살고 있었다. 신라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신라방이 있었고, 신라인들 중에는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 사하는 자,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자, 중국과 신라·일본으로 내왕하며 국제 무역에 종사하던 자들이 많았다. 이 곳에는 신라인이 찾아가 불공을 드리는 법화원이란 절 이 있었는데, 이 절은 819년에 장보고가 세운 것이다. 그는 여기에 노비로 팔려온 신라의 소년, 소녀들을 찾아 맡겨두고 있었다.
그 무렵 중국과 신라는 모두 중앙집권력이 약화되 고 흉년과 기근이 들면서 각지에서 도적과 해적이 들끓어 많은 신라인들을 잡아가 중국에 노예로 팔았다. 그는 비록 무관의 벼슬에 올랐지만 소년 시절에 겪었던 고통을 되새기며 혼자서만 평안함 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이들을 신라로 다시 데려 가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 해적들의 신라인에 대한 노략질에 분노했고, 국제무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 었고,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갔다.
<바다를 정복하다>
828년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왕에게 남해 해상 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아뢰어 청했다. 흥덕왕의 승인 을 받은 장보고는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하고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건설 될 당시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력의 성격을 가졌다. 청해진을 건설한 후 장보고는 해적들을 소탕하여 서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또한 해상권을 토대로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했다.
8세기 중엽 이후 신 라무역상들이 취급한 물품은 구리거울 등의 금속제품과 모직물 같은 신라산 물품, 당과 당 을 중계지로 한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물품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도 이 물품들을 취급했다. 장보고는 해상권 장악에 힘입어 외교 교섭까지도 시도했다. 840년에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를 파견하여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냈으며 일본은 국 제관례에 따라 이를 거부하였지만 무역은 계속되었다.
또한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의 인솔 하에 교관선을 보내어 교역을 활발히 했다. 일본의 승려 원인이 쓴 <대당구법순례기>에는 당시 당나라에 대한 것과 장보고에 대한 기 록이 있다. 이곳에 법화원에 대한 기록과 신라방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어 장보고의 세력 을 짐작할 수 있다.
<내분에 끼어든 결과는>
국제 무역을 통해 강력한 군대와 부를 축적한 장보고는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관여하 게 됐다.
836년 왕위계승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뒤의 신무왕) 일파는 청해진으로 피난와서 장보고에게 의탁했다. 838년에는 왕위계승과 관련된 분쟁이 일어나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게 됐 다. 이 정변을 틈타 장보고는 김우징을 지원하여 왕위에 즉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왕위에 오른 신무왕은 그를 감의군사로 삼고 식실봉 이천호를 봉했다. 이로써 그의 세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로 막강해졌고, 두려움을 느낀 신라의 귀족들은 그의 딸을 문성왕 의 둘째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그 후 장보고와 중앙정부의 대립은 심화됐다. 신라 정부는 장보고를 정면에서 토벌하지 못 하자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시켜 암살하게 했다. 장보고가 죽자 중앙 귀족들은 나머 지 세력들을 꺾어 청해진을 폐쇄하고, 청해진에 있던 사람들은 지금의 김제인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장보고는 9세기에 해상무역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는 당과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역 할을 했고,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신라정부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성장했으 나 결국에는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장보고 피살의 원인이 자신만의 사리사욕을 채운 결과라고 할 순 없다. 그가 가진 무력과 재력으로 통일신라 말기 정치 혼란으로 보호 받지 못하는 백성들을 돌보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라의 위신을 세우는 데 도 그의 몫이 매우 컸다. 그럼에도 국내 정치 힘 겨루기에 말려들어 죽음을 맞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by http://fori.new21.net/history/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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