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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흥왕 |  | |
| 법흥왕은 신라의 제23대 왕으로 이름은 원종이다.
지증왕의 원자로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는 연제부인 박씨이며 왕비는 보도부인 박씨이다. 그는 키가 7척이나 되고 마음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법흥왕은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 그는 517년 병부를 중앙에 설치하여 군사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법흥왕은 520년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정하지 않으나 골품제도에 관한 것일 것이다. 율령 반포와 동시에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시켰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눌지왕 때였다.
눌지왕 때 사신 자격으로 신라에 온 양나라 승려 원표가 불교를 신라왕실에 처음으로 전할 무렵에 묵호자도 온 것이다. 묵호자는 인도의 승려로서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일선군 모례의 집에 슴어서 민간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민간에서부터 전파되기 시작한 불교는 신라 귀족 집단으로부터 혹세무민하는 사교로 매도당하고 있었는데 신라와 중국이 외교관계를 맺자 불교가 신라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려하자 신라의 귀족들은 반대하였다. 조상신 대신에 불교로 대치한다는 것은 왕권의 강화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게 된다. 나중에 신라의 귀족도 불교의 윤회사상에 입각하여 받아들였고 그것은 귀족 불교화 하게 되었다.
법흥왕은 율령, 병부의 설치, 불교의 공인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그 기반위에 상대등 제도를 마련하였다. 상대등은 대등들이 모이는 귀족회의 즉 화백회의의 주관자이다. 이전에는 왕이 화백회의를 주관하였으나 귀족의 대표를 뽑아 그위에 왕이 군림하고자 한 것이다.
법흥왕은 이처럼 대내적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토확장를 하였다.
522년 백제의 남하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하자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시집보내 가야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그 뒤 법흥왕은 적극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가야를 압박한다.
법흥왕은 즉위 11년 524년에 남쪽 국경지방을 순찰하는 데 이 자리에 본가야의 왕이 함께 한다. 이때 법흥왕과 가야왕은 아마 투항 조건을 협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본가야는 법흥왕 즉위 19년인 532년에 금관국왕인 구형왕 김구해가 세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정식으로 신라에 합병되고 역사에서 소멸되었다. 본가야의 투항으로 법흥왕이 이끄는 신라는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삼아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법흥왕은 김구해에게 상들의 벼슬을 주고 그가 다스리던 전 국토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또한 그의 아들인 김무력에게는 각간의 벼슬을 주었다. 김무력은 바로 삼국통일의 일등공신 김유신의 조부이다.
왕권 강화와 영토확장에 성공한 법흥왕은 536년 독자적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는 데 이때부터 신라의왕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법흥왕은 또한 521년 기존의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남북조 시대의 북조 편향의 외교에서 벗어나 남조인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를 수립했다. 법흥왕은 이때 백제의 도음을 받았다. 이렇듯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법흥왕은 재위 27년 만인 540년에 죽었다. 시호는 법흥이고 앵공사 북쪽 봉우리에 묻혔다고 한다.
by http://fori.new21.net/history/main.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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