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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왕 |  | |
| 광개토왕과 함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로 평가되는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큰아들로서 394 년에 태어났다. 그는 광개토왕 18년인 408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광개토왕이 죽은 뒤 왕 위를 계승하여 고구려의 20대 왕이 되었다.
<적극적인 대중국 외교 정책>
왕이 된 후 재위기간 내내 그는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북중국의 상황은 여러 이민족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에 의하여 통일됐
으며,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송·남제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장수왕은 413년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했는데 무려 70년만의 일이다. 또한 남조의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북위와 백제를 견제했다.
한편,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떠오르게 되자 435년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여 외교관계 를 수립했다. 북위에 쫓긴 북연 왕 풍홍의 망명 요청을 받아들이고, 북위의 소환 요청을 거 절하며, 북위의 혼인 요청을 거절하는 등 갈등이 있던 때도 있었지만 위기를 잘 넘기고 비 교적 우호 관계를 맺어왔다.
장수왕은 대외적으로는 중국 및 북아시아의 여러 세력들과 다 각적인 외교를 통하여 안정을 이룩했고, 안으로는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노 력했다.
<국내 정비와 남진 정책>
414년에는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여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했다.
427년에는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수도 천도는 국내성 일대에 기 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세력의 약화 및 국가운영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의 확대와, 백제·신 라 방면으로의 남진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충족시킨 것이었다.
455년에는 백제의 왕이 교체되는 틈을 이용하여 공격을 단행했다. 475년에는 직접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 하여 과거 근초고왕에게 죽음을 당한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다.
또한 서해의 해상권을 장 악하여 백제 및 백제와 연결된 왜가 중국 남조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다.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처음 약소국을 돌보는 입장으로 시작, 왕권 분쟁에 개입하여 눌지마립 간을 옹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신라가 백제와의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인 입장으로 나오자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을 공격, 481년에는 지금의 흥해인 미질부까 지 진격했다.
<고구려 최대 전성기를 이룩하다>
이로써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동쪽으로는 북간도 훈춘, 북쪽으로는 개원, 남쪽으로는 아산만·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됐다. 인구도 2백년 전에 비해 3배 로 늘어나 고구려 최대 전성기를 이룩했다.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장수왕은 곳곳에 기념비 를 세웠다. 이 중 현재도 남아있는 것이 충북 중원에 있는 중원고구려비이다.
491년 장수왕은 98세의 나이로 죽었다. 왕위에 오른지 79년되던 해의 일이다.
대개 왕의 명칭은 후대 사람들의 평가와 관련있다. 장수왕은 이름에 걸맞게 장수를 누렸다. 그는 그 시절로서뿐만 아니라 지금도 보기 드물게 오래 살았다. 그러나 단지 장수만 한 것으로 그의 이름이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까닭이 없다. 그는 살았던 동안 내내 훌륭 한 업적을 남긴 왕이다. 특히 주변국과의 적절한 외교 정책은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더 욱 높였다. 그의 탁월한 외교정책은 오늘날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by http://fori.new21.net/history/main.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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