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광개토대왕 |  | |
| 고구려 제19대왕(391-412) 고국양왕의 태자, 본명은 담덕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이라 하였다.
소수림왕 4년(374년) 후에 고구양왕이 되는 왕제 이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국양왕 3년(386년)에 태자로 봉해졌다가 부왕의 사후 신묘년(391년)에 즉위하였다.
시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생전에 영토확장에 힘썼으며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등 고구려의 세력권을 넗히고 동북아시아 패자로서의 자주성을 드높였다.
광개토대왕은 남정북벌하여 한국 민족사에 있어 한 시대를 구획하는 ´광개토경´ 위업을 이룩하였다. 서쪽에 위치한 후연과는 처음에 우호관계에 있다가 후연왕 모용성이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공해오자 이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여 요동성과 요하지역을 차지하게 되고 다시 후연왕 모용희가 침공해오자 요하 이동지역에서의 세력권을 확고히 하게 된다. 북으로는 거란을 정벌하여 조공관계를 맺는다. 백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관계가 깨진 백제가 왜를 앞세워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는 신라를 침공하자 5만 병력을 보내어 가야지역까지 추격하여 일대를 장악하고 6성을 장악하는 등 세력을 행사하고 신라에 대해서는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거란이나 후연, 비려, 왜에 대해서는 토멸의 대상이었으며 신라나 백제, 가라제국은 정복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이들 신라나 백제, 가야는 동일집단으로 보고 통일의 위업을 이루려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즉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장사, 사마, 창군의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 제도를 두고 평양에 9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동시에 또한 아들인 장수왕 때 평양으로의 천도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412년 39세에 세상을 떠 414년에 능에 옮겨 장사지내고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린 비석을 세워 기렸는데 이 비가 바로 광개토왕릉비(일명 호태왕비)이다.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에 왕릉과 함께 세워진 이 비는 왜의 등장과 고구려의 발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양3국의 고대사연구의 논쟁점이 되고 있다.
<영토확장>
4~5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과 활력의 시대였으며 삼국의 정립이 국제적 교섭을 배경으로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위대한 정복군주가 탄생하였으니 바로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역사상에서 두 번 태어나셨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연인으로서의 출생과 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능비가 19세기 말 재발견 됨으로써 대왕의 훈적이 보다 뚜렷한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온 사실이 바로 그 것이다. 대왕은 소수림왕 4년 (374년) 왕제 고국양왕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으니, 바로 백제의 정복군주인 근초고왕의 몰년에 해당된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축을 이루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 있어 명암이 엇갈리는 숙명적 사건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대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담은 기록은 희소하지만 대체로 태어나실 때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기상이 늠름하였으며 성인의 풍모를 지녔다고 한다. 이는 물론 고대의 영웅사관에 기인하는 기술이라 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대왕의 성품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고국양왕 3년 13세에 태자로 봉해졌다가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셨으니 바로 신묘년(391년)의 일이었다. 대왕은 이후 22년간 짧은 재위기간 동안이었지만 남정 북벌하여 고구려사에 있어서나 한국민족사에 있어 한 시대를 구획하는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 위업을 이룩하셨다. 즉, 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로 서쪽으로는 풍부한 철산지인 요동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요하를 넘어 대능하유역으로부터 멀리 흥안령 산록의 시라무렌강 유역을 원정하고, 동쪽으로는 목단강유역으로부터 연해주 일원에까지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북으로는 송화강유역의 북만주일원으로 통치영역을 넓히고 남으로는 곡창지대인 한강유역을 획득하는 한편 멀리 낙동강 유역에까지 정복전쟁을 수행하셨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대왕은 백제,북연,동부여,신라,가라제국을 조공국으로 복속시키는 한편 태왕호와 영락 년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동방의 패자이심을 사해에 알리셨으니, 이는 당시의 고구려가 팽창된 국력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완성하고 제국질서로 이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위업을 이룩하신뒤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임자년(412년)에 붕어하셨다. 대왕의 본명은 담덕(중국문헌에는 안이라 하였다.)이나 생전에는 호태왕 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능비문에 의하면 년호는 영락, 시호는 호우총 : 국강상광개토지평안호태왕, 모두루묘지 :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 대왕의 생전 업적이 잘 나타나 있다
by http://fori.new21.net/history/main.htm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