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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尹善道, 1587~1671)
▶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 호는 고산·해옹, 시호는 충헌이다. 1612년(광해군 4)에 진사가 되고, 1616년에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 등지로 유배당하였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풀려나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후로도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 그러나 1628년(인조 6)에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뒷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고, 1629년에 형조정랑 등을 거쳐 1632년(인조 10)에 한성부서윤을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문학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으로 유배되었고, 뒤에 풀려나 은거하였다. 1652년(효종 3)에 복직하여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과의 갈등으로 사직하였고, 1657년(효종 8)에 중추부첨지사로 복직하였다. 그러나 1658년에 동부승지로 있으면서 남인 정개청의 서원을 철폐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송시열 등의 서인과 논쟁하다가 탄핵을 받고 삭직 당하였다.

▶ 1659년에 효종이 죽으면서 제1차 예송논쟁이 발생하자, 남인의 거두였던 그는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과 대립하다 패하여 삼수로 유배당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후인 1675년(숙종 1)에 남인들이 집권하면서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지만,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복서·음양·지리에도 통하였다. 시조에 특히 뛰어났던 그는 한국어의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다는 평을 들으며,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저서로는 『고산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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