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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李爾瞻, 1560∼1623)
▶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이다. 1582년(선조 15년) 생원·진사에 합격하여,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냈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159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0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 선조가 만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로 삼으려 할 때 소북(小北)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이에 찬성하자,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정인홍(鄭仁弘)을 사주하여 영경을 무고하는 한편 광해군(당시 세자)이 적합함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원배령(遠配令)이 내려졌으나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랐다.

▶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과거(科擧)를 주관하게 된 것을 기화로 그의 당파를 조정에 끌어들여 권력의 기틀을 다졌다. 유영경과 임해군(臨海君)을 사사(賜死)하게 하는 등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하고, 1613년(광해군 5년)에는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영창대군을 강화에 안치, 죽게 하고 김제남(金悌男)을 사사시켰다. 1617년 정인홍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참형되었으며 그의 세 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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