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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任士洪, 1445∼1506)
▶ 본관은 풍천, 자는 이의(而毅)로, 1465년(세조 11년)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가 각각 예종과 성종의 사위가 된 뒤부터 차차 권력을 쥐게 되었다. 성종(成宗) 초 도승지 때 유자광(柳子光) 등과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자행하여, 1478년(성종 9년)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으나 반대여론 속에 풀려났다. 1489년 왕명에 따라서 월산대군(月山大君) 정(撲)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으며 이듬해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왕이 간관(諫官)을 갈아치운 뒤 다시 등용되었다. 이어 관압사(管押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

▶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이후 권세를 독점하고 있던 유자광,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愼守勤)과 제휴하여 연산군의 생모(生母) 윤비(尹妃)가 폐비(廢妃)·사사(賜死)된 내력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했다. 같은 해 수차에 걸쳐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모면하고 권세를 누리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추살(推殺)되고 이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글씨는 촉체(蜀體)를 잘 썼고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다. 글씨에 <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衿川), <박중선묘비명(朴仲善墓碑銘)>(楊州), <이계손묘비명(李繼孫墓碑銘)>(廣州), <한확묘비명(韓確墓碑銘)>(廣州), <영원윤호묘비명(鈴原尹壕墓碑銘)>(麻田), <서거정묘비명(徐居正墓碑銘)>(廣州)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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