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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삼문(成三問, 1418-1456) |  | |
| ▶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1438년(세종 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생원(生員)으로 급제하였고,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집현전 학사·수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 1442년 박팽년·신숙주·하위지·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신숙주·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등과 함께 랴오둥[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하는데 공이 컸다.
▶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아버지 승(勝)·박팽년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였다. 그러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綢)이 성사가 안 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밀고하여, 이개·하위지·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車裂)의 극형을 받았다.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극형에 처해졌고,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 세 동생과, 맹첨(孟詹)·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 1676년(숙종 2년)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녹운서원(綠雲書院), 1681년 육신묘(六臣墓)(관련유적참조)가 있는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외에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 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의 충곡서원(忠谷書院)(관련유적참조) 등에 다른 사육신과 함께 제향되었고, 1758년(영조 34년)에는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by http://www.coreaking.com/4sub/humindex.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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