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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희(黃喜, 1363∼1452) |  | |
| ▶ 본관은 장수(長水)로, 개성(開城) 출생이다.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초명은 수로(壽老),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1376년(우왕 2년)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389년(창왕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년) 성균관학관과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우습유(右拾遺)·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지냈다. 1400년(정종 2년) 형조·예조·이조 등의 정랑(正郞)을 거쳐, 1404년(태종 4년)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그 후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일 때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서인(庶人:평민)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원(南原)으로 옮겨졌으나, 1422년(세종 4년)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이듬해에 복직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의 업적을 남겨, 세종이 가장 신임하던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영당,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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