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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  | |
| 처음 ‘박진식’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건 어버이날 특집 방송을 통해서였다. 그 후 또 한편의 다큐, <돌이 되어 죽어가는 시인>을 보게 되었고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를 읽게 되었다. 인물 다큐멘터리는 곧잘 사람을 눈물나게 하기 때문에 우연히 방송을 보더라도 나는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에 고정시켰던 적도 있다. 그러나 박진식 씨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 방송들은 삶에 대한 오기와 박진식 씨의 밝은 마음 때문에 감정에만 휩쓸리게 하지 않고 내 삶의 자세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나는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특별히 더 고통스러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누구든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 하게 돼있다는 것과 누구나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 앞에 예외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정도 이상으로 예쁘고 착했기 때문에 치명적인 불행을 감수해야 했던 내 친구 중 하나는 단지 비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생이 그렇게 신나고 살만한 것은 아니라는 내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진식 씨가 살아가는 인생은 비장애인에 대한 나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의 생각은 자칫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하다는 주장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역이라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 사고방식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혹은 많은 비장애자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박진식 씨처럼 매일 밤낮으로 아파야 한다면 그것만은 박진식 씨처럼 견뎌내지 못할 것 같다. 매일 밤낮, 피부가 헐어 짓무르고, 생채기를 건드려 통증이 심화될까봐 추운데도 이불을 덮지않고 자야한다면, 20년이 넘도록 아무도 만날 수 없이 누워만 있어야 한다면 나는 솔직히 지금보다 덜 낙담하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똑같이 죽음을 향해 간다 하더라도 비장애인 대부분은 그 사실을 잊고 산다. 그렇지 않다면 미칠 것이라고들 한다.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다는 박진식 씨 앞에서 이제 더는 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힘들다고 엄살 피우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주어지는 죽음´이 아닌 ´선택하는 죽음´에 대한 의도가 간혹 보인다.어머니, 죄지은 김에 마저 말씀 올립니다저를 죽여주세요어머니가 주신 목숨어머니 손에 쉬고 싶습니다부디 이 자식의 소원을 들어주세요아마, 하늘도 용서할 겁니다.
박진식 씨는 ´하늘도 용서할´ 거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이 사람에게 쓰여져야 한다고도 생각해본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사람이 나고 죽는 일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을 건방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박진식 씨에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말기를 바라는 이유는 좀 다르다. 견뎌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심정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험한 인간사는 어쩌면 박진식 씨에게는 동경하고 참여하고 싶은 세상일는지 모르겠다. 박진식 씨 앞에서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며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혼자서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롭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어차피 그 사람이나 나나 주어진 한평생을 사는 거라면 주어진 대로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동질감을 박진식 씨같은 분으로부터 느끼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의 사진이 인쇄된 광고띠를 벽에 붙여 놓았다. 그의 얼굴을 본다. 그는 웃고 있다. 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다. 눈매에선 고스란히 누적된 고통의 흔적이 들여다보인다. 그래도 웃고 있는 이유는 어머니와 독자를 위한 배려일 것이다. 다큐만 보더라도 그는 참 잘 웃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따라 괜히 한번 웃어본다.박진식 씨의 오기에 찬 자신과의 싸움, 결코 지지 말고 장하게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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