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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즘
지하철 1호선.

무슨 연극 제목의 아류같기도 하지만 지하철 창동역은 1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는 명색이 강북최고의 교통결절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비단 내가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여간 그 창동역은 개찰구는 2층에 있고, 4호선 플랫폼은 3층, 1호선 플랫폼은 1층에 있는 역 자체가 지하에 움트지 않은 몇 안되는 곳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지하철 1호선은 계단으로밖에 이동할 수 없다.

4호선은 올해 중순경에 엘리베이터 설치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도시철도공사의 경우 상대적으로 최근에 지어졌기 때문에 설계단계에서 이동자의 편의가 고려되기는 했지만 서울지하철공사는 시설이 많이 낙후되었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에 이제야 설비확충공사가 시작이다.

1호선 지하철은 플랫폼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오직 계단 뿐이다. 에스컬레이터도, 엘리베이터도, 휠체어사용자를 위한 리프트도 없다. 그럼 휠체어를 타는 사람은 어떻게 지하철을 탈 수 있냐고?

우문에 우답을 하자면,
´탈 수 없다.´
그러고보면 그동안 1호선 플랫폼에서 휠체어를 본 기억이 없다. 거의 5년 넘게 창동역을 이용했다는 내가 이렇다.

또 다른 이야기.

차도를 가로지르는 하얀 횡단보도, 그리고 그 위에는 신호등이 서로 마주보고 서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신호등 속 그림은 남자의 모습이다. 짧은 머리, 바지 입은 모습. 사람을 간결하게 표현하기 위해 그런 거 아니냐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통념상 ´여-긴 머리-치마´, ´남-짧은머리-바지´의 공식이 지배적인 세상인지라 말끔하게 의혹을 떨칠 수가 없다.

간결하고 효율적이라는 건 사후적합리화일 뿐이고, 오히려 전인류를 대변하는 남성의 모습이 신호등에서조차 상징물로 자리잡은 것이 아니냐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나마 하게 된 것도 요 며칠새의 일이다. 어쨌거나 20년 넘게 신호등을 봐왔다는 내가 이렇다.

사실 나는 대부분의 일상을 무심하게 지나친다. 그런한 종류의 인간들에게 다른 필터의 안경을 착용하는 건 세상을 다르게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평소에 보지 못하던, 하지만 너무나 명확히 보이는.

나에게 1호선 창동역은 계단만 있어서 힘든 곳이지만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에게 그곳은 ´갈 수 없는 곳´이다. 무신경한 보행자인 나에게 신호등은 그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변하는 교통정리기계에 불과하지만, 약간의 여성주의적 시각을 취한다면 그 신호등 역시 억압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다른 필터.

이 책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필터의 역할을 해준다. 언어안에 담겨있는 성적 지배와 억압을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언어와 인간, 언어와 사회간의 상호관계성을 전제에 깔고 한국어 뿐 아니라, 영미권 언어, 그리고 저자가 공부했던 폴란드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례를 들어 그 안에 숨겨진 억압을 ´드러낸다´.

이정도 소개했으면 나머지는 보면 될 일이고,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지배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그 지배이데올로기는 지배층은 물론 심지어는 억압당하는 이들에게조차 체화된다. 그 치명적인 반영이 바로 언어인셈이다.

프란츠파농도 직시했던 것처럼 지배자의 언어를 쓰고 있는 한, 스스로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함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것에 대한 집착이 삶을 메마르게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무시는 현실고착 밖에 가져오지 않는다는 말로 재반론이 가능하다. 그대가 책을 통한 저자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일상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려는 노력이, 그 자체로 변화의 가능성이 된다는 말 역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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