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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 미상 여자
파트릭 모디아노, 우아한 울림의 이름을 지닌 이 작가의 소설은 항상 같다. 추억과 침묵, 부재하는 시간, 조각난 기억... 이름도 성도 알 수 없는 주인공은 늘 안개가 부옇게 찬 거리에 서 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찾아 헤맨다. 연필로 그린듯 희미한 윤곽의 인물과 세상. 작가는 눈먼 이가 손을 내어 더듬듯 감정의 표면을 짚어나간다.

1999년 작품인 <신원 미상 여자> 역시 전작들과 맥락이 다르지 않다. 세 명의 여자가 차례로 등장하는데, 그녀들은 한번의 거절, 작은 부딪침 하나에도 쉽게 좌절하고 휘청거린다. 상처받은 그녀들은 즉흥적으로 길을 떠나지만, 자신이 제자리만 뱅뱅 돌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끝까지 이 도시에서 발을 빼지 못할 거라는 절망, 그리고 고독감.

그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깨에 얹어지는 작은 손길, 갈 길을 안내하는 불빛이다. 하지만 꿈과 현실의 경계에 혼자 놓인 그녀들은 멀리 달아나는데 실패하고 안개 낀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다. 늘 어딘가를 향해 출발하지만 결코 철로를 떠나지 못하는 기차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들, 답답하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상황. 이상하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서있는 모디아노의 인물들에게 완벽하게 동화되기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 ´환한 불빛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안개를 벗겨버릴 거라 기대´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한뼘 눈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삶. ´안개´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와 정서를 모디아노만큼 그려낼줄 아는 작가가 또 있을까.

모디아노의 대표작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특유의 ´사라짐, 결핍, 불안정´의 정서가 잘 살아있는 책이다. 특별히 난해한 단어나 어렵게 늘어진 문체로 씌여진 것도 아닌데, 몇번이고 되짚어가며 읽게 만드는 모디아노의 언어, 그의 나직한 목소리. 안개처럼, 분명 그 안에 있지만 실체는 잡기 어려운 짧은 소설집. - 박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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