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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  | |
|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진짜진짜 ‘토끼’ 판타지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너무 독특하다. 당근에 열광하고 자동차를 ‘흐루두두’라 하고 저마다 굴파기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선수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여기서 풀 좀 뜯겠습니다. 어젯밤 별로 못 먹었거든요.”는 대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나오니. 그렇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는 토끼를 주인공으로 한 동물 판타지 소설이다. 1972년 발표돼 지금까지 20개국 언어로 꾸준히 번역, 출판되고 있다. 올해로 30년 생명을 자랑하며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 영미권에서는 고등학교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작가 리처드 애덤스는 옛날 이야기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두 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토끼 이야기를 조금씩 지어냈었다가 딸들의 권유로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는 출판사마다 토끼 모험담은 곧 어린이 얘기라는 인식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하고 문전박대 당했지만 결국 단어 하나 고치지 않고 출판에 성공한다. 때문에 소설은 딸들에게 들려준 그대로 이야기의 매력을 담뿍 안고 있다. 토끼 생태와 자연의 생생한 묘사와 뚜렷하고 개성 넘치는 토끼들의 캐릭터, 독창적인 토끼 신화가 그렇다.
소설은 평온하던 샌들포드 마을에 고급 주택 개발이라는 재앙의 그림자가 뻗치기 시작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열한 마리 토끼들이 새로운 삶터를 찾아가면서 겪는 모험과 전투, 사랑과 우정이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예지 능력이 있는 겁많은 파이버, 겸손하고 현명한 방식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는 헤이즐, 과격하지만 의협심이 넘치는 투사 빅윅, 총명하지만 어려운 일에는 쏙 빠지는 블랙베리, 뛰어난 이야기꾼 댄더라이언 등 열한 마리 토끼는 이게 과연 토끼들인가 싶을 정도로 인간에 버금가는 살아있는 캐릭터들로 옹기종기 모여있다.
리처드 애덤스는 로널드 록클리의 「토끼의 사생활」을 참고하여 1년생 토끼들의 이주와 펠릿 씹기, 마을 크기에 비해 토끼 수가 많아질 때의 결과, 위험을 느낄 때와 기분이 좋을 때 하는 동작 등 토끼의 생태를 자세히 쓰고 있다. 시냇물밖에 안되는 물줄기를 큰 강으로, 전신주를 쇠로 된 나무로 아는 토끼들에게 고향을 떠나 워터십 다운과 에프라파에 이르는 여정은 험난한 길이다. 인간에게는 몇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지역 안에서의 이동이지만 토끼에게는 도처에 위험이 널려있고 목숨을 건 모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열한 마리 토끼들의 모험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기존의 동물 판타지들이 의인화에 의존하거나 우화에 속했다면 이 소설은 ‘먹기’와 ‘살아 남기’ 그리고 ‘짝을 짓는 일’을 생의 목표로 삼는 진정한 동물로서의 토끼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똥을 ‘흐라카’라고 한다든지 자동차를 ‘흐루두두’, 많다를 ‘흐라이어’, 죽는다는 의미를 ‘달리기를 멈추었다’는 식으로 토끼들이 쓰는 토끼말을 만들었다. 또한 이야기꾼 댄더라이언이 들려주는 엘-어라이라의 토끼 신화는 그 자체로도 풍부한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워터십 다운과 카우슬립 마을, 에프라파의 대비이다. 헤이즐이 이끄는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마을과 인간에게 기대어 살며 야생 토끼의 자존심을 팽개쳐버린 카우슬립의 마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연상케하는 에프라파는 토끼마다 표적을 새기고 전체주의적 통치를 한다. 각기 다른 토끼 세계는 인간 사회에 대한 훌륭한 비유로 읽힌다. 책장을 덮고 나면 토끼들이 범상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모든 동물들이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무시했던 자그마한 동물에게도 나름의 세계가 있고 한 평생이 있고 그 짧은 삶이 인간에게 주는 감동은 무궁무진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는 정말로 토끼 이야기이지만 진짜 토끼 이야기가 아니다. (김은선 kong@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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