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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  | |
| 신들은 죽지 않았다, 다만 모습을 바꿨을 뿐
터키의 옛수도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그리스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의 기둥을 뽑아다 중건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르테미스 신전 기둥 128개 중 127개의 기둥을 뽑아와 성당을 지었고 나머지 한 개는 있던 자리에 남겨둠으로써 고대 그리스 신들의 죽음을 알렸다. 더구나 하기아 소피아 성당 지하 저수고의 기둥 받침대는 메두사이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뱀이고, 얼굴을 보기만해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다는 무시무시한 메두사가 지금은 지하 저수고의 기둥에 깔린채 수장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메두사의 운명은 현대에서의 신화, 신들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하다. 메두사는 인간을 돌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힘을 잃었고, 제우스는 더 이상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존재에게 벼락을 내려칠 수 없다. 자신의 알몸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냥꾼을 사슴으로 만들어 사냥개의 이빨에 뜯겨 죽게 했던 아르테미스는 심지어 자신의 신전이 뽑히는데도 손을 쓰지 못한다.
이제, 신들의 권능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쓸모없는 듯 보이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신화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저자 이윤기는 이 책에서 ‘신화, 거꾸로 읽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현재의 다양한 문화 현상에서 신화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추적하는 새로운 신화 읽기이다. 저자는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회화, 조각, 건축물 등을 하나씩 제시하고 그 대상에 묻어있는 신화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백화점, 박물관, 의회 건물, 미술관, 약국과 병원의 표지판, 군의관 휘장 등에서 읽어내는 신화의 흔적과 그 의미는 우리의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더욱 흥미롭다. 예를 들어 서울 신세계 백화점 정문 장식은 풍요의 뿔 ‘코르누코피아’와 관련있다. 파리의 과일가게에서 볼 수 있는 원뿔형 바구니도 마찬가지다. 헤라클레스는 소로 둔갑한 아켈로오스와 싸우다가 그의 뿔을 뽑는데, 그 뿔에 풍요의 여신 코피아가 축복을 내려 빈만큼 다시 찬다는 ‘풍요의 뿔’이 되었다. 이 밖에도 금강역사가 사자가죽을 쓴 까닭이나, 군의관의 휘장에 뱀이 새겨진 이유를 저자는 여러 가지 신화를 통해 밝혀낸다.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담은 문화적 상징물들의 사진은 특히 인상적이다. 아무 생각없이 사진을 보았을 때와 달리 그 신화에 대한 저자의 쉽고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면 사진 속의 풍경, 그림, 조각, 건축 등은 의미있게 다가온다. 로댕의 작품 ‘다나오스의 딸’이 주는 비극적인 아름다움에 취했다가 그 배경 신화를 읽고 나면, 저 딸은 아버지 말대로 신혼 첫날밤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저승에서 밑 없는 독에 물을 채우는 49명의 딸 중 하나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아 이승에서 왕실의 모든 물을 길러야 했던 막내딸일까를 추측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나가게 된다. 또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아들 크로노스를 시켜 남편인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자르게 하고 그 피의 거품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는 신화를 알게 되면, 거품 위에 요염하게 서 있는 아프로디테를 그린 그림은 복잡하고 미묘하게 다가온다.
신화를 이해하면 차가운 대리석이 말을 걸어오고 한동안 그 앞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저자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들이 들려주는 풍요롭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을 듣지 못하고 지나쳤을까 싶다.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회화나 조각, 건축, 그리고 여러 상징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영생불사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여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주위에 살아 숨쉬고 있는 신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신화란 (저자의 비유대로) ‘이야기의 어린이’이며,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고 끊임없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풍요의 뿔임을 이 책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윤정윤 phyllis@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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