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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남, 죽음과의 만남 |  | |
| 당신의 죽음에게 편지 한 장 띄워보시길…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입니다.”(P.217) 이 말은 어찌 보면 반문의 여지조차 없는 상식일지 모릅니다.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삶이 죽음으로 종결된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길 저어합니다. 두렵기도 하고 무지한 탓이기도 하겠지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삶의 끄트머리에 늘상 매달고 살면서도 우리는 그게 자신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일 각종 사고와 질병, 노쇠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가지만, 스스로 그걸 경험하지 않는 이상 죽음은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 ‘타인의 사건’에 불과하니까요. 우리는 단지 타인의 죽음에 의해서만 불현듯 격동하는 암운에 휩싸인 듯, 죽음에 대한 상념에 빠져들게 될 뿐이지요.
그런데 지난 2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정진홍 교수는 죽음을 ‘만남’이라고 표현하는군요. ‘만남’이라…… 흔히 ‘만남’이란 살아있는 자들끼리의 대면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지요. 별다른 설명이나 수사가 없을 경우, 거기엔 반가움과 환희 등, 삶의 밝은 기운과 정서가 덧씌워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남’은 일종의 ‘기분 좋은 맞닥뜨림’이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죽음과의 만남’이라니요? 나아가 아는 누구의 죽음과 만나는 것도 아닌, 자신의 죽음과 맞닥뜨림이라는 데 이런 긍정적인 어사를 사용했다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듯합니다. 더군다나 정진홍 교수는 ‘죽음’을 사이에 두고 ‘만남’을 두 번 반복합니다. 그러자 묘하게도 긍정의 역설이 탄생합니다. 부채꼴로 공명하는 죽음에의 명상, 그로 인한 삶에의 긍정.
「만남, 죽음과의 만남」의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제게는 그런 느낌이 오래도록 뇌수 속에 박혀있던 묵은 정념들과 함께 솟구쳤습니다. 지나치게 주관적인 감상이라구요? 그런데 누군들 죽음을 주관적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은 가장 주관적이면서도 무엇보다 보편적인, 삶의 본질을 역으로 일깨워주는 존재의 근간입니다. 물론 이런 정의 역시 실제로 그걸 육체적으로 깨닫기 전에는 흔해 빠진 관념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진홍 교수는 그런 보편의 관념을 지극히 개인적인 성찰과 사유를 빌어 실질적으로 들려줍니다.
“죽음은 죽음 자체를 통하여 오히려 살아 움직입니다. 죽음은 그 죽음 주체가 살면서 삶을 통해 엮어왔던 관계망을 이번에는 죽음을 통하여 유지해 나갑니다. 죽음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실로, 그리고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로, 삶과 이어지는 것입니다.”(P.132)
죽음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관점과 절실성 여부에 따라 공염불이 되기도 하고,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죽음의 그런 속성이 바로 ‘죽음이 살아 있는 실체’라는 명제를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정 교수의 말마따나 ‘죽음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실’이니까요. 죽음은 삶의 여러 가지 관계들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삶의 가치와 질을 변화시키면서 늘 우리 곁에 살아 있는 것이지요.
죽음은 심리적인 동시에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동시에 과학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영역을 초월합니다. 아시다시피, 정진홍 교수는 명망 높은 종교학자이지요. 종교란 게 무엇입니까? 정 교수에 의하면 많은 종교는 ‘죽음 뒤의 삶’을 믿음의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종교 연구에 있어 죽음의 문제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일생을 종교연구에 바친 정 교수가 죽음에 대한 이렇듯 긴 이야기를 유장하고 힘있게 풀어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 자신이 죽음에 대한 강한 두려움과 이중적인 열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됩니다.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진실이지만, 정 교수는 자신을 사로잡은 죽음의 문제에 뛰어듦으로써 비로소 삶의 근원과 신비를 너무도 지당한 현실의 질서 속에서 발견해낸 것입니다.
「만남, 죽음과의 만남」은 그러므로 노년에 이른 정 교수의 삶의 고백이자, 수십 년 천착해온 종교학의 지극히 인간적인 에필로그로 읽힙니다. 죽음 앞에 다다른 자로서 삶은 얼마나 더 애절하고 소중하게 여겨질까요? 죽음을 통해 삶을 사랑하는 방법과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면, 죽음은 더 이상 삶의 어두운 배면이 아닐 겁니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의 삶을 정화해주는 당신만의 죽음과 만나보십시오. 그런 다음 보편의 진리를 낮고 막힘이 없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들려주는 정 교수에게 길고 긴 고백의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면, 당신은 이미 삶과 죽음을 분별없이 사랑하는 사람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P.310) (강정 igguas@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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