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빼앗긴 자들 |  | |
| 멀고 먼 우주에서 되돌아보는 인류의 역사
인간의 사유란 궁극적으로 벽 앞에 부딪친 자의 자기발견 같은 게 아닐까? 벽은 어디에든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이고, 모든 공간 또한 벽이 없이는 그 자체의 공간감을 형성하지 못한다. 벽은 열려있는 것의 전제조건이자, 각기 다른 것들을 다르게 만드는 변별력의 기준이 되는 선이다. 어슐러 K.르귄의 「빼앗긴 자들」(이수현 옮김, 황금가지)은 인간의 근본, 나아가 세계와 우주의 근본을 되짚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감히 말하건대, 이 작품엔 인류의 모든 것이 집대성돼 있다. 무궁무진한 지식의 보고가 미로처럼 펼쳐지는 미래의 타임캡슐.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역시 다름아닌 벽으로 되어 있다.
“벽이 있었다. 그렇게 중요해 보이는 벽은 아니었다. 다듬지 않은 돌에 대충 모르타르만 발라 쌓은 벽이었다. 어른키에는 미치지 못하고 어린아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는 정도 높이에, 문이 나 있기는 하지만 구색만 갖춘 것일 뿐, 그 벽은 벽이 아니라 하나의 선, 하나의 경계선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 (중략) … 모든 벽이 다 그렇듯 그 벽도 양면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안이고 어느 쪽이 밖인가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달려 있었다.”(P.7)
소설은 그 오랜 벽을 자진해서 넘어간 행성 아나레스의 물리학자 쉐벡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나레스와 우라스는 쌍둥이 행성이지만, 그 체제는 상이하다. 관료주의와 집단주의에 의한 빈부격차와 남녀차별이 극심한 우라스는 혁명가 오도의 주도 하에 ‘평등하고 모순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아나레스에서 온 쉐벡을 경계하고 감시한다. 쉐벡은 오도의 아나키즘 혁명이 있은 후 200년이 지나면서 자체모순을 드러낸 아나레스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 조직’의 일원으로 우라스로 넘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쌍둥이 행성 우라스는 아나레스와는 너무 다른 사회, 숨막히는 위계와 편견 속에서 그 뿌리부터 곰삭은 모순을 질병처럼 앓고 있는 사회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와 반향을 지닌 단어들에서부터 우주를 해석하는 과학적 관점의 이질성 등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사실들에 대한 엄청난 혼돈과 분열을 야기한다. 이럴 경우, 과연 벽은 허물어진 것일까? 어쩌면 더 큰 벽과 요지부동의 단절감이 벽 바깥의 전부는 아니었을까? 소설은 이런 끝없는 질문 속에서 안이기도 하고 바깥이기도 한 벽의 양면을 수시로 넘나든다. 그러면서 인간의 오랜 역사와 현실의 첨예한 대립상들이 범상찮은 알레고리를 형성하면서 읽는 이를 끌어 당긴다. 그건 가히 어떤 소설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인류에 대한 거시적인 사유의 집성체라 할 수 있다.
SF라는 장르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래서 미래소설이라는 어줍잖은 분류 속에 애매하게 섞여 있지만, 「빼앗긴 자들」은 결국 인류의 미래를 깊이있게 통찰해냄으로써 현재의 지도를 새삼 부각시키는 민감하고도 웅대한 사유의 결과물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극단으로 몰고가면 인간에게 항시적인 현재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물결타듯 휩쓸리면서 현재라 규정지어진 한시적인 시간의 응고물을 사후적으로 체험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아주 먼 미래를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결국엔 미·소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대(이 작품은 1974년에 발표됐다)에 대한 예민하고도 과학적인 통찰을 알레고리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읽으면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의 두께가 자칫 헐거워 지면서 더 많은 이해와 상상의 통로가 차단당한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현실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물리학과 심리학, 종교와 인류학, 남녀문제와 성정치학 등 이 작품을 읽으면서 뇌리에 박히는 인류의 사안들은 어느 것 하나 그 핵심을 드러내지 않는 게 없다. 때문에 그런 엄청난 사유의 그물망을 전혀 힘들이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꿰어내는 글쓴이의 역량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어슐러 르귄은 도처에 만연한 벽을 뚫고 나가는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외계인들의 삶을 통해 뫼비우스 띠 같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삶의 자잘한 질곡들을 묘파해낸다. 그러면서 멀고 먼 행성들을 돌아 우리의 삶 자체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실, 그렇지 않겠는가. 늘 속해있으면서도 딴 세계의 일인 것만 같은 우주의 곡률과 혼돈. 그것을 감득하게 되는 순간이란, 자신만의 벽 앞에서 스스로의 진리를 모색하면서 벽을 문으로 밀고 나가는 바로 그 순간일 테니깐. 인간이라면 누구나 캄캄한 벽 앞에선 우주의 미아, 그리하여 새로운 우주를 모색하는 발견자인 것이다. (강정igguas@libro.co.kr/리브로)
by www.libro.co.kr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