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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 속 여행 |  | |
| 내 어린 영혼을 지배했던 천가닥 만갈래의 흑지
또래들이 좋아하는 빨강, 파랑, 노랑의 색을 좋아하지 않고 주황색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처음의 부끄러움은 어느 순간 묘한 희열로 바뀌어 있었다. 남들과 다른 것을 좋아한다는 데에 대한 불안과 죄책감은 나만이 알고 있는 매력과 뒤섞여 말못할 기쁨이 되어주었다. 나에게는 「15소년 표류기」,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의 모험 이야기를 쓴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쥘 베른의 세계가 꼭 그런 것이었다. 어린 시절 내 작은 영혼을 지배하던, 콱 움켜쥐고 있던 세계. 누구에게는 황금박쥐의 가면일 수도 있고 대학 다니던 사촌오빠의 흰 셔츠일 수도 있던 미묘한 희열을 맛보게 해준 이는 바로 쥘 베른이었다.
나는 비단 어린 시절 누구나 바라던 꿈과 희망의 모험과 낭만에 빠졌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형제, 따뜻한 집이 있는 행복한 현재를 버리고 어둡고 끈끈한 베른의 세계로 향하는 것을 동경했었던 것이었다. 가령, 인기 있던 TV외화 ‘타잔’에서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을 보고 그 늪의 부드럽고 편한 느낌을 상상하며 몸을 떨었던 것처럼. 그것은 어린 시절 나에게 말못할 쾌락이었다. 아이들에게 쾌락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어린 나이에 감히 맛보아서는 안되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더더구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각오가 있어야지만 즐길 수 있는 세계의 짜릿함은 더욱 그러했으리라. 나는 이것을 잘 설명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설령 이야기 한다해도 상대가 질겁을 할까봐 숨겨왔다. 나는 어째서 쥘 베른에게 옴싹달싹 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다행히도 장 콕토, 사르트르에서 르 클레지오에 이르는 프랑스의 유명 작가들이 어린 시절 베른의 소설세계에 빠졌었다고 고백한 것을 보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할까. 이제 나이가 들어 뻔뻔스러워졌다고 할까. 내가 이렇게 부끄럼을 탄 데에는 지금껏 쥘 베른의 이야기들이 아동용으로만 취급되었던 까닭이 클 것이다. 해마다 전세계에 새로 출판되는 번역서의 총수를 싣는 유네스코의 「번역서 연감」을 토대로 이런 저런 계산을 해본 결과 성서를 제외하고 베른의 소설들이 6000권 내지 8000권으로 종합 1위를 기록하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번역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국내에 대표작 「지구 속 여행」과 「해저 2만리」를 포함하여 2005년 5월 베른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16작품(20권)이 꾸준히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거기에 각 책마다 초판본에 실린 삽화까지 짧게는 두 장에 한번 꼴로 나와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쥘 베른이 1905년 향년 77세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일년에 두어 개의 작품을 써내며 일궈낸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알려져 있는 세계와 알려지지 않은 세계’라는 부제에 걸맞게 지구의 중심, 해저, 달세계를 비롯해 인간의 족적이 남겨지지 않은 곳인 무인도와 미개지를 그려내며 지리학, 생물학, 천문학, 고고학과 같은 당시의 지식 등을 풍부하게 펼쳐 내고 있다. 베른이 작품 속에서 창조한 잠수함과 로켓 등의 기구나 움직이는 해상도시 등 과학적 개념들이 현실에서 발명되고 보편화되기도 했다.
지구의 중앙이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초등학생도 다 안다. 노틸러스호를 훨씬 능가하는 가공할만한 잠수함이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와서 한 세기 전에 발표된 베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의미를 찾기 이전에 우리가 베른의 작품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인정해야 할 터. 지금 그 누가 우연히 발견한 고문서 한 장 달랑 들고(고문서 자체도 눈을 씻고 봐도 없지만!) 지하로 탐험을 떠나 거대한 버섯숲과 뼈로 뒤덮인 평야를 만날 것이며 고래보다 큰 방추형의 ‘수수께끼의 괴물’을 추적할 생각을 하겠는가. 베른의 소설은 지구의 핵이 자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지하 세계에 뻗어있는 구물구물한 통로를 꿈꾸는 것이, 아직도 심해 어딘가에는 괴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리덴브로크 교수나 네모 선장과같은 19세기의 캐릭터들은 모험과 탐험에 자신을 바쳤고 자신의 생을 일치시켰던 존경할만한 인간의 순수성을 본받고 싶게 만들어준다.
쥘 베른의 작품에 나오는 기술과 지식은 이제 새로울 것이 없는 자명한 세계이다. 그러나 새로울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이 베른의 세계에서 꼭 필요하거나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머리에서 그것들을 환상과 결합해 얼마나 부풀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내는 모험의 힘을 우리들이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작업을 해낸다면 우리는 베른의 세계에 새로울 것이 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험과 환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리라.
항구도시 낭트에서 태어난 쥘 베른은 어린 날 인도행 무역선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아버지에게 들키고 ‘앞으로는 꿈속에서만 여행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후에 그의 글들을 보자면 이 약속은 너무나 잘 지켜진 것이었다. 「지구 속 여행」이나 「해저 2만리」는 어린 시절에 읽었던 문고본 소설이나 축약본 만화를 기억한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터운 책들이다. 그러나 읽을수록 이 책들의 두께가 감사하게 여겨질 것이다. 쥘 베른이 안내하는 여행은 끊임없이 여정을 연장하고픈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적어 놓은 천갈래 만가닥의 길로 따라가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워라. 이 책은 야금야금 읽고 싶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이야기이거늘. 기억나는 것이라곤 자이언트 옥토퍼스와 용암과 물이 소용돌이치던 지하세계뿐이었지만 이 책을 손에 쥐자 가슴이 뛰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사적인 리뷰라고 욕먹을 각오하고 썼지만 마음은 후련하다. 쥘 베른의 이야기에 홀딱 반했다고 말하지 못한 빚을 이제야 푼다. 독자 여러분의 베른 여행에 건투를 빈다! (김은선 kong@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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