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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해지도 |  | |
| 이 소설은 여자를 위한 모험 소설이다
제목만으로도 뻔히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는 소설이 있는가하면 제목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소설도 있다. 「항해지도」는 분명 전자에 속하는 소설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다. “그 사내는 이스마엘이란 이름이 더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는 늘 코이라 불렸다.”(P.11)로 시작해 스펙터클 해양 스릴러, 미스테리 역사 어드벤처물 소설이라는 확증을 더해주었다. 이스마엘은 허먼 멜빌의 해양소설 「백경」의 선원이자 백경의 공격에 살아 남은 최후의 선원이었다. 그러나 역시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줄여서 레베르트라 하자)의 최신작은 지적 스릴러의 대가라는 칭송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뒤마 클럽」과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이라는 두 권의 화려한 명성에 전혀 누가 될 것이 아니었다.
전직 일등 항해사 코이는 해양 물품 경매소에서 18세기 우루티아 해도를 놓고 경합하는 탕헤르와 팔레르모의 뒤이어진 다툼에 우연히 끼어들게 된다. 해양 박물관 큐레이터이자 군무원으로 일하는 탕헤르는 200개의 에메랄드를 싣고 가던 중 침몰한 데이 글로리아 호를 인양하기 위해 코이를 끌어들이고 ‘악마의 무지개’라 불리는 에메랄드를 손에 넣게 된다. 그러나 해도를 놓고 군침을 흘리던 침몰선 인양 회사 사장 팔레르모의 음모가 기다리고 있는데…….
줄거리만 보자면 순전히 남성용이라 일컬을만한 요소로 점철돼있다. 보물 난파선의 추적, 바다, 경쟁자, 매력적인 여자 등등. 그러나 뭔가 무거운 물건을 들 때 숨을 멈추듯이 나는 한참을 읽어 가고서야 이 소설이 구구절절이 여자를 위한, 여자에 의한, 여자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숨이 막혀왔다. 아, 물론 이 표현법은 여자를 알고 싶은 남자들을 위한 소설이기도 하다는 강한 레토릭이다.
뱃사람의 ‘거리 두기’를 전략적으로 쓰고 있는 코이에게조차 그녀는 신비로운 여자다. 좀 막힌 남자들은 이런 표현을 쓸 것이다. “도대체 이런 여자는 첨 본다”, “여자도 아니네” 라고. 그녀는 ‘특이한 남성용 스테인리스 스틸 시계’(P.73)만을 차고 있으며 ‘샤워 코롱도 향수도 뿌리지 않았’(P.74)고 상대의 말을 끊고 자기 의도대로 말을 끌고가는 교묘한 기술도 ‘탕헤르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P.300) 것이다. 뱃사람으로 바다를 터전하고 살던 코이는 배를 난파시킨 죄값으로 바다에 설자리를 뺏기게 된다. 되려 모험을 제안하는 쪽은 멋진 여자 탕헤르이다. 오뉴월에 서리를 내릴만한 한을 품은 여자가 아닌 이상 밤잠을 자지 않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어떤 일에 몰두하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다. 더욱이 그녀가 에메랄드를 찾는, 욕망의 길로 내달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유무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난파선 한 척에 매료되어 도전하는 것은 지금껏 남자가 품어온 원대한 포부, 일생의 꿈이라는 관념에 대한 멋진 타격이다.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서 탕헤르를 보는 코이는 그녀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다. 그저 영화 〈L.A 컨피덴셜〉의 킴 베이싱어와 같은 여자라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요.”(P.84)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요.”(P.304)
200쪽이 넘는 텀을 두고도 탕헤르는 코이에게 ‘당신은 날 몰라’라고 말할 수 있다! 코이 또한 여자가 어떤 인격으로 구성되었는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 당연하다. 탕헤르는 신비롭고 위험하고 강하고 남자를 압도하는 바다를 꼭 닮아 있으니. 탕헤르는 거친 바다에 썩 어울리는 여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에 매진하는 여자다. 그녀는 우리를 품어주지는 않지만 코이의 말처럼 따를 수밖에 없는 하나의 길이다.
“그녀는 마지막 불씨가 다 꺼질 때까지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눌러 댔다. 이처럼 집요한 여자가 아니라면 그 어떤 여자도 그런 식으로 이 사건에 개입하지도, 포커꾼 같은 눈초리로 쳐다보지도, 압살을 하듯 그렇게 애를 써 가며 담뱃불을 끄지도 않을 거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완벽하게 알고 있어. 그리고 난 다행이든 불행이든 이 여자가 가는 길에 함께 서 있어.”(P.113) (김은선 kong@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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