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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퍼 로드 |  | |
| 종이가 전해진 길에서 만나는 낭만적인 역사
˝승리자가 역사를 기록하며 역사를 쓸 사료를 남기는 법이다. 하지만 패자의 역사가 햇볕을 보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그런 작은 단편들이나마 최대한 찾아내 올바른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p.242)
「페이퍼 로드」에 실린 이 말은 이 책이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페이퍼 로드」는 종이가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기까지의 과정을 복원해 낸다. 역사, 고전, 문학에 두루 걸친 저자의 해박함과 종이와 연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역사적 사실이나 문헌의 기록도 놓치지 않는 꼼꼼함이 돋보인다. 저자는 노련하고 세심한 탐정처럼 보통 사람에게는 별 단서가 되지 않을 흔적 하나 하나로 과거를 조합해 낸다.
종이는 후한 때 채륜이 발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1933년 중국 신장의 로프노르 호수에서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154년 전 연대가 새겨진 종이가 발굴된다. 1957년 중국 파교 부근의 한대 초기 무덤에서도 ´로마노프의 종이´ 보다 오래된 종이가 발견된다. 저자는 이런 일련의 사실을 통해 종이가 후한 무렵 단시간에 발명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저자는 채륜을 종이의 발명자라기보다 획기적인 개량자로 본다. 오랜 진통기와 시행착오 끝에 채륜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이다운 것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종이의 발명은 수많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창의와 노력이 쌓인 결과이다. 저자는 특히 표모(漂母)라고 불리는 하층민 여자들의 손길에 주목한다. 표모란 물가에서 헌솜을 두들겨 바랬던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의 작업이 몇십 년 몇백 년 계속되다가 종이가 탄생했던 것이다.
화려한 문화 발전의 원인이 되었던 중국의 제지법은 서방으로도 전해지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는 ´탈라스 전투´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8세기 중반 중앙 아시아의 탈라스에서 당과 이슬람군이 전쟁을 벌였을 때, 당군은 자군 내에 적과 내통하는 카를루크족으로 인해 패하였다. 이때 이슬람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 중, 제지공이 있어 이슬람에까지 끌려가 제지 기법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당시 중앙 아시아의 흐름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전쟁 외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제지법은 탈라스 전투 이전에 이미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해 있던 중국인들에 의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페이퍼 로드」는 역사적 사실과 사실 사이의 행간을 상상과 유추, 사료를 통한 고증으로 채우면서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그 길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배어난다. 표모들의 부르튼 손이 느껴지고, 채륜과 수많은 영웅들의 일생이 담겨 있으며, 거친 사막과 초원을 달렸던 수많은 민족들의 말발굽 소리가 살아있다. 그래서 저자 자신의 말대로 ´낭만으로 가득찬 에세이´가 되었지만 그저 하얗게 텅빈 종이가 아닌 누르스름하고 얼룩지고 진득진득한 종이에 대한 이야기가 됐다. 그것은 ´칼리프의 피´가 묻어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코란의 종이와 같이 흥미롭고 생생하며 풍요로운 것이다. (윤정윤 phyllis@ 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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