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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로틱한 발 |  | |
| 야한 발, 섹시한 구두, 무시무시한 하이힐
말도 안 된다. 발이 에로틱하다니. 허벅지도 아니고 종아리도 아니고 발목도 아니고 정말 발이 에로틱하다고? 발이 건강에 중요하다는 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다. 발 마사지가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휴식이라거나 내 몸에 주는 가장 큰 선물이 발 마사지라는 얘기는 수긍이 간다. 발을 안마할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한 포만감은 어디 비할 데 없는 행복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발이 ‘에로틱하다’는 점에는 쉽게 동조하기 힘들다.
발 치료 전문의이며 의학박사인 윌리엄 로시는 「에로틱한 발」의 첫 문장부터 대놓고 독자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발은 에로틱한 신체기관이고 신발은 그 발을 보호하는 섹슈얼한 씌우개”라는 주장을 펼친다. 발도 모자라 이젠 신발까지 섹슈얼하단다. 그런데 이건 좀 그럴 듯하다. 여성의 하이힐에는 뭔가 다른 의미가 숨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으니 이건 좀 그럴 듯 하다. 그래도 여전히 발을 섹시하다고 생각할 순 없다. 지은이는 나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독자들을 위해서 꽤 그럴듯한 예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슬로바키아에서는 페니스를 트레차 노가(제3의 발)라고 부르며, 중부 유럽에서는 야채기름을 엄지발가락에 바르면 페니스가 발기된다고 믿었다. 스트립쇼의 여왕인 집시 로즈 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의 아무 것도 몸에 걸치지 않은 여성과 노출이 많은 구두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바로 가장 좋은 부분은 감추어져 있다는 환상을 주는 것이죠. 전라(全裸)가 되기 직전의 모습은 남성 관객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갑니다. 내가 무대 의상을 고를 때마다 제일 먼저 신경 쓰는 것은 내 구두가 과연 섹시한가 입니다.”(p.35)
이제 좀 정리가 된다. 발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에로틱한 것이며 신발은 그 발을 더욱 잘 숨겨주기 때문에 섹슈얼한 도구가 된다는, 그런 얘기다. 하긴 인간의 발만큼 꼭꼭 숨어있는 게 또 있을까? 그리고 신체에서 발만큼 무시당하고 있는 게 또 있을까? 지은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동서양의 온갖 사례들을 쉴새없이 열거한다. 책표지에 있는 충격적인 문구들은 ‘발’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충분히 유혹할만하다. ‘발이 작을 작으면 작을수록 성충동이 강하다’거나, ‘숙녀의 품위는 야한 구두를 신고서도 창녀가 아니라 숙녀처럼 보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얘기들은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여성의 하이힐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지은이가 발 치료 전문의니 무슨 충고라도 해줄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전혀 없다. 하이힐에는 실용적인 가치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로시는 하이힐이 ‘지난 수세기 동안 남녀 모두에게 에로틱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 발명된 모든 발명품들 중에 가장 교묘하고 인기 있는 장치’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발의 불편함과 기형을 견뎌내면서도 즐거운 것은 마치 남성의 성기를 소유한 듯한 느낌 때문이라는 가설도 서슴지 않는다. 하이힐이 가진 남근성이 남녀 모두에게 성적인 쾌감을 전달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인간 중심적인 책이 아니라 너무나 ‘발’ 중심적인 책이다. 그래도 나쁠 건 없다. ‘발 이야기’의 고전이랄 수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이런 얘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얘기냐 하면…….
다 아는 얘기는 생략. 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황금 구두가 발에 딱 맞는 여성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신데렐라의 두 언니와 계모가 쾌재를 불렀다. 큰언니가 먼저 구두를 가지고 신어봤다. 너무 작다. 엄지발가락이 걸려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어머니가 칼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발가락을 잘라버려. 네가 여왕이 되면 걸어 다니는 일은 없을 테니까.”라고. 와 잔인하군. 큰언니는 발가락을 잘라내고 구두를 신었다. 그런데 구두와 스타킹에서 피가 흘러내려 탄로가 났다. 그러자 계모는 둘째 언니의 발꿈치를 잘라내고 왕자에게 보여준다. 역시 피가 흘러 발각. 발가락과 발꿈치를 잘라내는 장면이 아이들에게 끔찍하다는 이유로 후대의 이야기에서는 삭제된 것이다. 물론 신데렐라의 발이 그만큼 섹시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은이의 의도가 어쨌든 발에 관해 이렇게 상세한 책은 처음이다. 왕따 당하던 아이의 성공담을 읽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짜릿함이 느껴지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시각을 배제하고 보자면 ‘무시당하던 발의 복권’이란 측면에서 이만큼 유용한 책은 없을 것이다. 이제 자신의 발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서 마사지를 하거나 숨어 있는 섹시함을 찾아내는 일이 남았다. 두 가지 다 할 수 있으면 더 좋고. (김중혁 vonnegut@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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