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
|
|  | 우리말 철학사전 1 |  | |
| 우리말로 철학하기, 당연한 거 아니냐고?
우리사상연구소에서 출간한 「우리말 철학사전」(지식산업사)은 당황스런 제목의 책이다. 일견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말을 저렇게 책제목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풀어보자면 우리말로 철학하기 위한 사전이라는 얘긴데 그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 아닌가? 하지만 철학계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책을 출간한 ‘우리말 철학사전 편찬위원회’의 위원장 이기상씨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말로 주체적으로 사유하여 정리한 우리의 ‘철학함’이 담긴 우리말 철학사전이 출간된 적이 없다. 부끄럽지만, 지금 팔리고 있는 가장 큰 「철학대사전」이라는 것을 보면 바로 우리 철학계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다. 그 책은 동독 철학자들이 발간한 「마르크스 레닌 철학사전」과 「철학자 인명사전」을 번역해 출간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몇몇 뜻을 같이 하는 학자들이 ‘우리말 철학사전 편찬위원회’를 결성하게 됐고 ‘우리사상연구소’의 후원아래 이 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로 철학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구 중심의 철학’이라는 촘촘한 그물을 어떤 방식으로 피해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말 철학사전」은 ‘사전’답게 중요한 철학개념 12개를 소제목으로 내달았다. ‘과학·문화·사회·언어·이성·이해·인간·나·자연·자유·존재·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근본적이면서도 어려운 질문이다. 서울대 장회익 교수를 비롯해 백종현(서울대), 이진우(계명대), 정대현(이화여대), 박이문(전 포항공대), 박순영(연세대), 최봉영(한국항공대), 김상봉(철학 아카데미), 신승환(가톨릭대), 홍윤기(동국대), 이기상(한국 외국어대), 김형효(정신문화연구원) 등의 연구진이 이 어려운 개념들의 해설을 맡았다. 하지만 내용은 그리 녹록치 않다. 사전이라고 해서 간략하고 쉽게 용어를 해설한 것이 아니라 작은 논문처럼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철학적 질문에 답하고 있다. 서구의 개념을 우리 식으로 맞게 고치고, 한국적인 테두리로 개념을 가두는 일이 그리 쉬울리 없었을텐데 「우리말 철학사전」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예를 들어‘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사유를 펼쳐나간 백종현 교수는 라틴어 ‘쿨투라(Cultura)’를 언급하면서 한자 ‘문(文)’과의 접점을 살펴나간다. ‘쿨투라’가 재배의 뜻이라면 ‘문’은 무늬를 놓는다는 뜻. 그러니까‘무늬 놓음(文化)’과 ‘경작하다(culture)’는 새로운 환경으로 변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으니 같은 의미군이라 볼 수 있다. 「우리말 철학사전」이 돋보이는 지점은 이런 식의 방법, 즉 한국어와 외국철학의 사유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라는 항목도 마찬가지. 이기상 교수는 서양에선 ‘존재’의 테두리 안에 속하는 것만을 ‘있다’고 규정하고 현존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단정짓는 반면, 한국에서는 ‘존재’의 테두리 밖에도 ‘무’ ‘공’ ‘허’가 ‘있다’고 본다며 그 차이를 설명한다. 따라서 ‘무’가 배제된 협소한 의미의 ‘존재’보다 ‘무’까지 포용하는 포괄적 의미의 ‘있음’이 새로운 존재규명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상 교수는 서구에서 존재를 눈앞에 현존하는 것만으로 좁게 생각한 결과 생태계 파괴와 같은 ‘무의 반란’이 생겨났다고 비판하면서 우리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존재이해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비존재적인 것에 관심을 쏟아온 우리의 사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건져 올리는 대목이다.
“우리말 속에 새겨져 있는 존재의 의미를 그 근본과 구조에서 파헤쳐 보았다. 시작이 걸음마 단계이기에 유치해 보이고 억지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이 주제에 관한 한, 우리에게는 기댈 위대한 외국의 사상가도 없고 참조할 문헌도 없다”는 이기상 교수의 선언적 분석은 이 책의 의미와 성과와 한계를 한꺼번에 대변해 주는 대목이다. 서양철학의 근본개념을 우리말로 소화해야 하는 어려움을 토로한 예라 볼 수도 있겠다.
사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우리말로 철학하기’라는 새로운 가능성의 신호탄을 울렸다는 점만으로 「우리말 철학사전」의 가치는 충분하다. 수많은 토론과 개정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철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1993년 창립된 ‘우리사상연구소’는 앞으로 5년간 매년 1권씩 12개의 철학개념을 정리한 사전을 꾸준히 출간할 계획이다. (김중혁 vonnegut@libro.co.kr/ 리브로)
by www.libro.co.kr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