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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003, 연암 박지원 밴드와 접속하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신비주의 스콜라 철학자 ‘빅톨 위고’
이 책은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사절단에 동반하게 된 그간의 사연과 그의 열하 탐방을 그린 것이다. 사행단원들을 속여 밤마다 잠행을 탄 그는 필담으로 친해진 한족 선비, 장사치들과의 이야기들을 적기 시작한다. 정조의 문체반정, 이용후생, 북학파, 18세기 실학, 열하일기. 박지원 한 명이 끌고 다니는 명사가 어찌나 많은지 사람들은 구태여 그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물론 정약용, 박제가, 송시열 등도 알고 싶어하지 않지만).

교과서에서 달달 외운 이런 명사더미들은 그를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니라 먼지 낀 박물관 초상화처럼 느끼게 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고전하면 하품부터 나오는 조건반사에 죄의식을 가질 것 없다. 이제껏 당신들이 읽었던 책은 솔직히 너무 재미가 없었다. 해석은 고리타분하고, 휴대용 옥편에서 찾아지지 않는 한문은 어찌나 많은지. 고미숙은 그런 의미에서 참 용한 저자다. “유머의 천재, 패러독스의 달인, 중세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란 말로 슬슬 미끼를 던져 사람들을 기어이 천재들의 두뇌 싸움판이었던 18세기 조선으로 끌고 내려온 것이다.

“유머는 익숙한 사유의 장을 비틀어 버리거나 아니면 슬쩍 배치를 변환하는 담론적 전략이기도 하다. 연암 사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러니와 역설, 긴장과 돌출은 모두 ‘유머러스한’ 멜로디 속에서 산포된다. 사람들은 이 유머에 현혹되어 혹은 분노하고, 혹은 깔깔거리느라고 자신들이 이미 이전과는 전혀 다른 ‘필드’ 에 들어갔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P.230)

조선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코끼리에 관한 단상, (기린을 처음 보는 프랑스인들의 한바탕 소동을 다룬 ‘자라파 여행기’가 떠오른다), 상이한 문법과 체계의 배치 때문에 생기는 언어의 아수라장 (중국인과 한국인의 이 대화는 허무개그를 연상시킨다), 일명 ‘판첸라마 대소동’이라 명명한 엄숙한 조선 사행단과 달라이라마의 접견 풍경에선 성리학과 불교의 차이만큼 엄청난 진폭의 괴괴한 웃음이 흐른다. ‘포복절도’ 는 열하일기에서 가장 빈번이 등장하는 단어이며 ‘유머’ 는 박지원 밴드의 ‘키워드’ 인 것.

´리라이팅클래식 001’. 풀어 쓰면 고전 다시 읽기 시리즈 첫 권쯤 되겠다. 이 책이 잘 쓴 소설처럼 읽히는 건 견고한 서사 때문이 아니라, 저자가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와중에도 ‘연암 박지원 밴드’ 멤버들과 장복이 창대, 정진사, 득룡이 등 각 인물의 캐릭터를 출혈 없이 복원해냈기 때문이다. 고전 속에서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것 같은 살아있는 인물들과 만난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이런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는 책의 전모는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부터 시작된다. 과거를 불러들여 현대와 접속시키는 소장학자들의 모임. 이 요상한 이름의 비평기계들이 다음에 무슨 일을 벌일지는 아마 출판사들이 더 궁금해 하지 않을까? 지하 구석에 박혀 있던 이들도 ‘연암 박지원 밴드’만큼 잘 나가고 있다. (백영옥rararal93@libro.co.kr/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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