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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텔레비젼 수리공
나는 텔레비젼 수리공

[임의진]

“젊은 양반이 뭐 따물로 시말테기(힘) 한나 없이 틀어박혀만 사신다요? 바람도 쐴 차

우리 집도 놀러도 오시고 그러시란 말이요.”

추수감사라고 쌀 한 가마니 내려놓으시며 상춘 씨가 그랬다. 그러고 보니 옥수수 쪄먹

던 처서(處暑) 그 즈음 말고는 봄골을 찾은 기억이 감감하구나. 무심했지 무심했어.

단풍나무 씨앗도 나무에만 붙어살기 재미없어 날개를 매달아 날아가지 않던가. 재미

삼아 마실가는 일은 둘째로 치고라도, 엎어지면 코 닿을 동네에 저토록 오매불망 나

를 위해주는 친구가 살고 있는데.

“만날 집에만 있진 않아요. 가끔 안골로 마실도 다니고 그래요.”

“또 뉘집 테레비가 고장이 나부렀는갑재?”

이크, 들켜 버렸네. 사실은 어제도 그랬다니까.

“햅쌀로 맛-난 동동주 담가 놓을팅게 꼭 놀러 오시쑈이?”

그리하마 약속을 받아 쥐고서야 저이들 내외 발길을 돌리신다. 겨울나기가 겁이 나는

가? 함박눈에 갇히면 친구가 새삼 보고플 두메산골, 거기 외로움만큼 큰 두려움이 어

디 또 있으랴. 그래도 저이들은 서로 말동무할 반려자나 있어서 다행이지.

어제 논정댁 할머니 집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밭에 다녀온 사이 노모께 찾아와 며칠

째 텔레비전이 고장이 나서 심심해 못살겠노라고 아들 목사한테 부탁 좀 해달라고 그

러시더란다. 죽을병도 안수기도를 해서 고친다는 목사들이 있다던데 나는 그런 건 가

망생신도 없고 텔레비전 하나는 잘 고친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난 목사는 된다.

서둘러 공구 가방을 챙겨들고 안골로 내려갔다. 바쁜 사람 불러다 놓고 할머니는 어

딜 가셨지? 아무리 동네 복판이라고 하나 대문도 훤히 열려 있고 방문도 빠끔히 열린

채였다. 리모컨을 몇 번 눌러 보았는데 이런 허망한 일이. 건전지 약이 다했구나. 고

쳐본다고 이것저것 눌러 놓으셔서 본체도 몇 군데 이상이 있었지만.

내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를 다 해왔지. 새 건전지를 꺼내 갈아 끼웠다. 지대가 높아

서 그런가 화질이 우리 집보다 더 나았다. 할머닐 뵙고 생색이라도 내고 가야지. 앉

아 있으려니 액자를 해서 벽에 걸어둔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이 보였다. 할머니 사진

은 장차 영정으로 쓸 일이 남았겠구나. 자녀들 결혼사진도 보이고 손주놈 발가벗은 백

일 사진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저세상에서 잘 살고 계시겠지? 중절모에 자전거를 타고 출타를 나가시다

가 내 인사를 받으시면 일부러 자전거에서 내려 근황을 묻곤 하셨던 할아버지. 먼지

가 잔뜩 앉은 할아버지 사진틀을 내려 걸레로 구석구석 닦고 다시 올려놓았다. 병중

에 계실 때 찾아뵙고 손이라도 한번 더 잡아 드렸어야 옳았는데 꼭 뒤늦게 이런 후회

로구나. 사진틀을 닦아드리는 것으로 죄송한 마음을 덜 뿐.

“오메 진작 오셨능갑네?” 할머니가 돌아오셨다.

“도둑 들면 어쩌시려고 대문 열고 돌아 댕기신대요?”

“가꼬갈 것이 뭐가 있간디요. 혼자 오래 살다 보믄 도둑놈도 반가운 뱁이당게요.”

할머니는 그만 돌아가겠다는 나를 가로막고서 라면이라도 끓일 터이니 들고 가라고 성

화셨다. 그럼 한 그릇 먹고 가볼까나? 이왕 끓이실 거면 달걀을 넣어야 라면은 제 맛인데.

“할머니. 달걀도 넣으십니까?”

“달걀은 없는디.”

“아니 넣지 마시라고요. 저 달걀 무지하게 싫어해요.”

급히 말을 돌렸다. 뽀글뽀글 라면물이 끓는 사이 할머니는 리모콘을 쥐고 채널을 이

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해보시고는 흡족하신 듯 한 말씀하셨다.

“실력이 진짜 대단하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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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는 전남 강진과 광주 두 곳에 ‘남녘교회’라는 작은 교회를 세워 예배를 하고, 한 뙈기의 밭을 일구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산문집 <참꽃피는 마을>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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