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글 나누기
joungul.co.kr 에서 제공하는 좋은글 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장미도둑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와 대면하는 즐거움
한국 영화 ‘파이란’의 원작 소설 ´러브레터´를 쓴 일본 소설가 아사다 지로의 단편은 종종 소설에 대한 흥미를 잃었을 때, 이야기 읽는 맛을 되살려주는 제철음식과 비슷하다. 이 제철음식이 주는 교훈은 한 가지다. 원래 날 것 그대로의 소설은 좋은 이야기라는 점.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을 읽는 일은 날 것 그대로의 소설을 맛보는 일과 비슷하다.
첫 번째 소설집인 「철도원」에 실린 소설들은 이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한계까지 끌어올린 것들이다. 표제작 ´철도원´만 해도 죽은 사람이 버젓이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과연 이런 설정으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는 걱정이 들 정도다. 이런 느낌은 ´백중맞이´에서도 되풀이된다. 하지만 이 한계에 육박한 무리한 설정에 맞서며 아사다 지로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라도 감당할 수 있는 작가임을 보여준다.

이번에 출간된 소설집 「장미 도둑」은 「은빛 비」(김미란 옮김), 「낯선 아내에게」(박수정 옮김) 등에 이어 국내에 4번째로 소개되는 소설집이다. 수록된 작품은 ´수국꽃 정사(情死)´, ´나락(奈落)´, ´죽음 비용´, ´하나마츠리´, ´장미 도둑´, ´가인´ 등 모두 여섯 편이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은 환상의 세계에서 점차 실물의 세계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였는데, 「장미 도둑」은 그런 과정의 최근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겐 「시마과장」으로 유명한 만화가 히로카네 켄시의 초기 단편집 시리즈 「인간교차점」의 세계와 대단히 흡사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건 삶과 생활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심성이 히로카네 켄시의 만화나 아사다 지로의 소설에 잘 드러난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히로카네의 만화가 소설을 닮았거나 아사다의 소설이 만화를 닮았다는 말일 수도 있다. 반면에 아사다 지로가 히로카네 켄시와 결정적으로 나뉘어지는 부분은 에도(도쿄) 토박이의 감각을 지녔다는 점이다.

옮긴이 양윤옥씨는 “도쿄내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아무리 가난해도 옷차림을 제대로 갖춰 입고 먹을 것을 제대로 갖춰 먹고, 사는 집을 단정하게 간수하는 것이다. 도쿄내기가 의식주에 유난히 격식을 따지는 바탕에는 철저한 자기 절제가 강하게 깔려 있다”고 설명한다. 이게 어떤 감각인지는 E. 사이덴스티커의 「도쿄이야기」(허호 옮김, 이산)에 잘 나타나 있어 참고할 만하다.

아사다 지로의 팬이라면 망해 가는 온천 관광지에서 만난 늙은 스트립 쇼걸과의 만남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는 정리해고된 사내의 이야기를 담은 ´수국꽃 정사´나 1960년대 도쿄 올림픽과 히나마츠리를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을 애잔하게 그려낸 ´하나마츠리´를 가장 즐길 만하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단편은 ´나락´과 ´장미 도둑´이다.

´나락´은 도입부의 신문 기사를 제외하면 모든 내용을 대화로만 풀어간 방식이, ´장미 도둑´은 일방적인 한쪽의 편지로만 이야기를 풀어간 방식이 눈에 들어온다. 그간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된 적이 많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시피 아사다 지로가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식은 영화의 이야기 전개와 대단히 흡사했다. 하지만 ´나락´과 ´장미 도둑´은 아사다 지로도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에도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갈수록 이야기의 강도가 떨어진다는 점이 유감스럽게 느껴진다. 아사다 지로가 작년 한 해만 출간한 소설이 장편 3권에 단편 1권, 1993년 데뷔한 이래 매년 평균 5권 정도를 꾸준히 펴냈다. 아사다 지로 같은 사람에게 “소설을 좀 천천히 써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웃긴 일이 되겠지만, 그 왕성한 창작력에 놀라고 조금씩 아사다 지로 소설의 느낌이 사라지는 듯해 아쉽다. (김연수 larvatus@libro.co.kr/리브로)



 
비즈폼
Copyright (c) 2000-2025 by bizforms.co.kr All rights reserved.
고객센터 1588-8443. 오전9:30~12:30, 오후13:30~17:30 전화상담예약 원격지원요청
전화전 클릭
클린사이트 선정